3당합당, 역사적 과제 해결과 상반

  14대 국회의원 총선등 92년 권력교체기가 시작되면서 여ㆍ야 각 정당및 사회 각 세력의 권력쟁탈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 되고 있다.
  3월께 14대 국회의원 총선거, 5월 내지 6월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올연말께 대통령선거등 일련의 선거를 앞둔 모든 정치세력의 목표는 권력 장악이다.
  현재 권력쟁탈을 위해 나선 모든 세력은 각자의 철로를 달리며 각기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국민대중은 어떠한 주장과 소리가 자신의 이해와 한국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소리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현재의 목소리만이 아닌 지금까지 달려온 철로위에 이들 각 정치세력이 어떠한 족적을 남겼고 이들이 앞으로 가게 될 철로의 방향을 국민들은 보고 싶어한다.
  진정으로 어떠한 세력이 앞으로 우리사회를 올바로 끌고갈 것인가는 과거와 현재의 족적을 살펴볼 수 밖에 없고 국민대중은 이를 통해 미래를 선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6ㆍ10항쟁의 시대적과제

  대부분의 국민대중은 한국사회의 시대적ㆍ역사적 과제를 찾는 근원지를 87년 6월10일부터 시작된 전국민적 6ㆍ10민주대항쟁에서 찾는데 주저함이 없다.
  6ㆍ10민주대항쟁은 수십년동안 억눌렸던 국민적 이해와 욕구의 폭발적 분출이며 한국사회발전의 전환점을 이룬 역사의 분수령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6공을 마감하고 7공의 문턱에 들어선 92년 권력교체기에 국민대중의 정치권 전체에 대한 평가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6ㆍ10민주대항쟁은 5공말기부터 시작된 직선제와 간선제에 대한 논쟁을 중단시키고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선언한 전두환전대통령의 <4ㆍ13호헌>에 대한 국민적 반대로 시작됐다.
  그러나 6ㆍ10항쟁의 성격은 단순히 5공정권에서 6공정권에로의 정권승계에 대한 반대만으로 협소하게 해석될 수 없고 한국사회의 총체적 개혁과 발전을 요구한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노태우대통령의 6.29선언에 나타난 8개항에서 이같은 해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87년 6월29일 노대통령이 발표한 <국민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은 △대통령직선제개선△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선거법개정△국민기본권신장△언론자유창달△사회각부문의 자치와 확대△정당의 건전한 활동보장△과감한 사회정화조치강구△김대중씨등 사면복권및 시국관련 구속자 석방등 8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민주당및 재야운동세력이 <대국민 항복선언>으로, 집권여당은 <위대한 결단>이라 불렀던 <6.29선언>은 비록 철저한 보수적 민주화 논리의 울타리에 갇혀있다 하더라도 5공내내 줄기차게 문제됐던 이 당시의 대체적 평가이었다.
  6.10대회에서 나타난 국민적 요구는 단순히 정건의 교체방식ㆍ선출방식만이 아닌 한국사회전반의 <개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에따라 6.29선언이후 폭발적으로 대두된 국민들의 욕구를 당시 언론들은 △군의 정치적 중립△언론자유보장△사법부독립△노동문제의 해결△인권보장 △농촌문제해결△통일문제△경제의 민주화등을 시대적 과제로, 6共정권이 담당해야할 과제로 정리했다.
  때문에 6.10항쟁, 6.29선언이후 들어설 정권및 정치권의 역할은 과거정권과의 단절만이 아닌 과거 역사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개혁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과 개혁을 추진했어야 할 6공의 모든 정치세력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곱지 않다.
  단적인 예로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허무주의가 그것이다.

  정치적 허무주의(?)

  지난해 실시된 기초의회및 광역의회선거의 투표율은 50%를 갓 넘었을 뿐으로 현실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나타냈다.
  또한 5공 아래서 풍미했던 위정자에 대한 풍자가 최불암시리즈등으로 바뀐것은 허무주의의 사회심리를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이같은 국민적 허무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책임은 현 정치권에 있다.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한 국민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과거를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의 유지와 확대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6공이 들어선이후 여ㆍ소야대국회에서 보여준 5공비리와 광주문제등의 처리과정은 여ㆍ야정치권의 관심의 과거와의 단절과 미래를 위한 개혁추진에 있는지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확대등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87년 6월10일, 잠실체육관에서 <합헌적(?)>으로 권력승계를 다짐했던 노태우씨나 전두환씨의 5공비리와 광주문제처리를 둘러싼 혈투는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더 많은 권력쟁탈을 위한 게임의 성격이 농후했다.
  수개월동안 TV등을 통해 전개된 힘겨루기는 다분히 6공정권의 안정을 위해 5공세력의 제거 목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이 당시 정가의 분석이다.
  이같은 5공비리와 광주문제에 대한 불철저하고 미온적인 태도는 야당에서도 나타냈다.
  광주민중항쟁을 조사한 국회특별위원회구성을 둘러싸고 평민당은 <피해당사자가 위원장을 맡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했고, 또한 민주당도 <피해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위원장을 맡는 것은 적당치 않다>며 서로 위원장 자리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해 세간의 웃음을 사기도 했다.
  당시 야당들은 13대총선과 대선동안에 각각 <피해당사자라야 광주문제를 올바로 풀수 있다>, <피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야말로 광주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다>고 서로 다투어 주장했던 장본인이다.
  또한 全씨의 처리문제에서도 야당들은 <우리는 노대통령에 대한 평가 조차 신중히 대처해 왔는데 전씨문제로 판을 깰수 없다>, <全씨구속을 원치 않는다>고 주장해 과거청산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국회청문회가 끝난뒤 1노3김이 작성한 5공천산 합의문에는 5공비리와 광주지상이 명쾌하게 밝혀지지도 않았으며 책임자도 가려지지 않았다.
  결국 여ㆍ야정치권은 5공비리와 광주문제를 과거에 대한 단절의 의지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의 유지와 확대에 이용했다는 평가이다.
  당시 한 언론가는 <1노3김의 합의문은 5공청산의 종결을 선언할 만한 가치가 없다>며 <그정도의 5공청산이면 그동안 낭비한 2년간의 노력이 통한스럽다>고 한탄하며 5공청산에 참여한 여ㆍ야정치인 모두를 비난했다.

  <구국의 결단>과 <정치쿠데타>

  <구국의 결단>인가 <밀실야합>인가로 여ㆍ야 정치권의 목표와 의도를 또 한번 극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노태우대통령(당시 민정당), 김영삼씨(당시 민주당), 김종필씨(당시 공화당)등 3인은 90년 1월22일 청와대회등 이후 <새로운 역사창조를 우한 공동선언>을 발표, 민정당, 민주당, 공호당 3당의 조건없는 통합에 합의하고 민자당창당을 선언했다.
  합당선언문을 통해 이들은 민주발전과 국민대화합, 민족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앞에 <오로지 국민앞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조건없이 새로운 정당으로 통합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대해 야당이었던 평민당은 즉각 <3당보수대연합은 민주적 절차와 국민의 동의없이 이뤄진 정치쿠데타>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또한 당시 재야의 대표격인 전민련도 <제2의 10월유신을 위한 서곡>이라며 3당합당을 비난했다.
  1노2김의 3당합당은 노대통령이 퇴임하기에 앞서 내각제개헌을 단행하고 김영삼, 김종필민자당최고위원이 차례로 총리또는 수상을 맡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한 1노2김간의 <밀약>이었던 것으로 현재까지 밝혀지고 있다.
  합당초 본인들의 부인이 있었으나 추후 3인의 각서가 폭로되면서 당시의 밀약설은 입증됐다.
  여당이 피나는 경쟁에 패해 정권을 야당에게 넘겨줄 경우 노정권에 대한 비판은 자명하고 전임자에 대한 보복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노대통령이 합당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평가된다.
  또한 김영삼씨의 경우 4ㆍ26총선패배이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당내도전, 평민당의 고사작전, 89년 4월 동해재선거의 공화당 후보 매수사건등으로 사면초가에 빠짐에 따라 <태어나서는 안될 정당>이라고 주장하며 적대했던 민정당과의 합당을 실시했다.
  김종필씨의 경우 제4당의 위치에서 도저히 단독으로 집권할 가능성이 없기때문에 연합이 불가피했고 또, 실제로 집권당으로 변신한 김씨는 정치적으로 입지가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정치는 통치만이 전환>

  4ㆍ26총선으로 제1야당이 됐던 평민당은 민자당 합당이전까지 꾸준히 민정당과의 정책연합을 통한 연정등을 염두에 두는등 권력배분에 몰두했던 것으로 정가에서는 관측했다.
  특히 89년 노대통령의 대통령선거 공약이었던 <중간평가>에 대해서도 평민당의 김대중씨는 청와대회담에서 증평연기에 합의했고 <최상의 정치예술>이라고 극찬하는등 민정당과의 정책연합을 목적으로 한듯한 언행을 서슴치 않았었다.
  또한 국회광주청문회에서 노대통령의 광주관련부문의 언급회피등에서 노린 평민당의 목적은 6공 정권과의 공감대확대를 통해 권력을 배분받고, 나가서 차기정권을 장악하겠다는 구상으로 당시 정가는 분석하고 있다.
  이같은 정계개편이 신년벽두부터 터지자 국민대중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4ㆍ26총선에서 국민대중이 마련해준 여소야대의 4당구조가 채2년도 못돼 정치담당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바뀌자 국민들은 정치권에 대한 분노나 배신감을 표했다.
  여소야대의 4당구조를 탄생시킨 4ㆍ26총선의 민의는 민주화와 개혁과 정권교체를 향한 국민들의 강한의지의 표현이었는데 이를 뒤집을 만한 특별한 정치적 계기와 국민적 요구도 없이 인위적으로 정치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인제변호사는 이를 두고 <국민들에게 참여의 기회는 커녕 대중조작의 대상이 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며 <한국정치는 정치력의 결핍, 정치의 부재속에서 통치만이 전황한다>고 3당통합을 비난했다.
  결국 과거와의 단절을 통한 개혁의 토대를 마련하라고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던 6공의 정치권은 5공비리와 광주문제의 처리과정, 민자당합당의 인위적 정계개편등에서 볼수 있듯이 과거와의 단절의지와 행동이 부족했다는 것을 읽을수 있다.
  
  위기자초한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와함께 6월항쟁은 이같은 과거와의 단절 못지 않게 미래를 위해 권위주의적 통치의 청산, 국민기본권신장, 노동문제의 해결, 농촌문제의 해결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자당합당이후 91한해동안 언론의 지면을 채운 것은 수서비리등 권력형비리, 강경대군치사사건등 권위주의통치결과등으로 나타나 시대적ㆍ역사적 요구와는 상반된 결과만 초래된 실정이다.
  공권력에 의한 강경대군치사사건은 정건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며 6공화국 최대의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가하는등 6ㆍ29선언이후 최대의 시위사태로 나타난 강군치사사건은 6공의 통치방식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4ㆍ26총선이후 4당체제에서 합의되고 개정된 노동관계법등이 노대통령의 <비토권>에 의해 묵살된 것은 노동자농민의 기본권신장에 대한 정부의 태도와 정치권의 정치력부재를 재차 확인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이같은 정부의 강경대응과 국민의 기본과의 함수관계는 소위 <양심수>라고 불리는 구속자현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6공 들어서 재야운동세력이 주장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운동세력들의 구속자수는 5공때보다 훨씬 증가된 실정이고 노동자등 국민대중의 비율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 국민기본권보장에 대한 6공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민가협에 따르면 88년부터 91년 11월10일까지 모두 5천1백86명의 양심수가 구속되어 하루 평균 4.4명의 구속자가 발생했다.

  하루평균 4.4명의 <양심수>양산

  반면에 5공의 경우 81년부터 87년말까지 구속된 양심수의 숫자는 모두 4천7백명에 하루평균 1.6명이 구속됐을뿐이라고 민가협은 밝히고 있다.
  특히 구속자들의 신분을 보면 91년 11월10일 기준으로 학생이 4백67명으로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노동자가 3백48명(30%)재야운동가 89명(7%), 출판예술관계인이 33명(2.5%)등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양심수>의 증가는 악법개폐의 불철저성등에 기인하는것으로 국민기본권신장의 정도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실망 못지않게 국민대중들은 6공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표명하고 있다.
  국민의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소비자물가는 90년말 대비 8.9%의 상승률을 기록해 국민생활수준이 얼마나 어려워졌는가를 반증하고 있다.
  통계청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82년부터 85년까지 소비자 물가는 연평균 2.7%, 도매물가는 1.1%의 상승률을 기록한 반면 87년부터 89년까지의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6.1%, 도매물가는 2.0%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또한 <수서비리>의 폭로는 정경유착의 문제점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재벌위주의 경제정책해소라는 6월항쟁의 역사적과제를 떠안은 6공정치권이 여ㆍ야모두 <한보그룹>이라는 재벌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수서비리는 정치적 전체에 대한 도덕성을 추락시킨 것은 물론 정치권이 누구를 위해 경제정책을 실시하는 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가상승, 비리, 투기로 점철

  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북방정책>은 6공최대의 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련과의 국교수립이 이룩된 것은 물론 중국과의 수교전망도 밝은 실정이다.
  또한 남북한관계에서도 UN동시가입의 성과가 나타났으며 가까운 장래에 노태우대통령과 김일성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도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북방정책의 성과만큼 대미ㆍ대일관계등 선진국과 맺은 외교관계에서의 저자세와 남북관계성과물의 내재화부재라는 재야운동세력의 주장은 귀담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방정책으로 사회주의권에 진출했던 초만에도 이들 나라와의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했으나 90년부터는 적자로 전환되고 있어 북방정책의 경제적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5공청산 이후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해결과제도 역시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과거의 재판이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92년 권력교체기의 한해가 시작되면서 이같은 과거와의 단절과 개혁의 책임이 또다시 국민대중에게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지영한<대전매일 신문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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