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유지속 <통제된 개방정책>

  최근들어 남북관계가 급진전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해 12월 13일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 총리에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ㆍ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공동으로 서명되었으며, 이어 31에는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이 합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까지 제6차 고위급회담이 마무리되어진 상황이며, 남북한 양측은 이번 제6차 고위급회담을 통해 합의서의 이행과 핵문제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다고 한다.
  사실 지난해 제5차 고위급회담이 성사되기전까지만 해도 남ㆍ북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이 회담이 쉽사리 타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일반의 예상을 깨고 남북관계가 급진전을 보게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남북한 당국자간의 대폭적인 양보의 서로의 주장에 대한 절충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이로인해 남북대화의 기본적인 틀거리가 확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통일문제의 측면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점 등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왜 남북한 당국이 기존의 고압적인 자세를 갑자기 철회하고 합의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번 합의서를 남북한 정권의 담지자들에 의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과거의 남한 당국은 남북관계를 자신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시기적절하게 이용해 왔던 선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북한이 이번 합의서에서 보듯이 대폭적인 양보를 하면서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에 집착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향후 남북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측면이므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기도 하다.

  ⅰ. 세계적 지각변동과 동북아 정세

  북한의 변화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외적인 요인은 바로 세계사적인 지각변동과 그에 동반한 동북아 정세의 변화일 것이다. 이미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일본, EC등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속도로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련의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이 급격히 퇴조하는 가운데 미ㆍ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세력은 동북아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기존에 팽팽하던 양진영간 동북아에서의 대립구도는 일시에 허물어졌으며 북한은 동북아에서 수세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외교적으로는 더욱더 고립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동북아 정치지형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북한을 곤궁에 빠뜨린 또 하나의 요인은 미국의 동북아정책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기존의 대소봉쇄정책이 더이상 동북아정책의 기조로서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자신들의 현지주둔군과 전술핵을 점차적으로 철수시켜 나가는 새로운 지역 방위전략으로 이행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이와 같이 판단하게된 배경에는 진영모순의 완화에 따른 지역분쟁으로 이행이라는 군사적 필요성과 함께 전술핵의 외국배치보다는 최첨단 재래식무기의 판매가 자국의 이익에 보다 도움이 된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미국이 이러한 <신국제질서>를 구축하려는 의도는 지난번 걸프전을 통해 현실로 외화되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사찰 압력을 보였던 것이 단순한 위협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제2의 이라크>로 미국의 군사적 표적이 돌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러한 위기의식이 북한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게 되었고 <핵사찰의 거부>를 통한 원칙의 고수보다는 <현실적 수용>을 통한 관계개선이 자신들의 입지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판단을 하게된 것이다. 이같은 북한의 판단배경에는 또 다른 현실적 측면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일본과의 수교협상이 그것이다.
  지난 90년 9월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ㆍ북한간 관계개선에 대한 합의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로인해 북한은 더욱 고립되어 가는 상황이고 북한 내부의 경제위기를 타개할 길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그동안 강조해왔던 자주성과 주체성의 견지에 대한 막대한 훼손을 입히면서도 조ㆍ일 수교와 조ㆍ미관계 개선의 걸림돌을 뽑아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ⅱ. 북한의 내부적 요인

  앞서 우리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변화가 동북아 정치지형의 변동과 외교관계 개선의 필요성이라는 외적 규정력에 의해 일정정도 기인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북한의 남북관계 변화에 보다 규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동력은 외적 규정력보다는 오히려 내부의 조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부조건의 변화야말로 남북관계 개선의 본질적인 동력이자 외적 규정력을 형성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변화를 규정하는 북한내부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한 내부에서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위기가 그 하나요, 김정일로 가시화 되어지고 있는 안정적인 권력의 승계가 또 다른 하나이다. 북한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수치조차 입수할 수 없는 현재의 상태로서는 무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현재 북한이 경제적으로 무척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중 유일하게 경제체제의 상대적 안정과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중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식의 경제발전 모델을 <통제된 개방정책>이라 부르는데, 이는 전사회적으로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가운데 <두만강 경제특구>등 경제특구 중심으로 제한된 경제개방 조치를 통해 경제활성화를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분야에서는 시장 경제의 확대등을 통한 자본주의 요소의 선택적인 도입이 필요로 된다. 따라서 북한은 남북관계를 비롯한 대외관계의 개선을 통해 경제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전제조건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질서재편구상을 일정정도 묵시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우중의 방북도 바로 이러한 경제협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의 중요한 태도변화를 감지해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까지 주장해 왔던 <남북 사회단체 연석회의>등 다방면적 교류합작을 폐기하고 당국자나 대자본을 중심으로한 남북교류를 주로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칫 실용주의적 교류로 경도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남한의 민중운동 진영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사실 북한의 이러한 대외관계의 태도변화는 후계자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내외적 토대구축이라는 측면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있다. 즉 남북한 당국간의 권력승계에 대한 상호묵시적 합의를 통해, 북한은 남한 민자당정권의 안정적 지배체제를 인정하고 남한은 북한의 김정일 후계구도를 승인한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일로의 권력승계가 어느 정도 가시화내지는 공고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지난해 12월2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김정일이 추대됨으로 인해 북한은 실질적인 <김정일 체제>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가 북한의 후계자로서 대외적인 승인을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남북관계 및 대외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태도변화는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ⅲ. 남북관계 변화에 대한 평가와 전망

  앞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최근 남북관계의 변화는 남북한간의 긴장완화와 군비축소등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합의하고 있다. 더불어 남북통일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는데 기여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시기가 남한 내부에 있어서는 총선ㆍ대선등을 앞둔 권력재편기의 시기이고 현재의 정권은 자신의 지배체제의 안정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방정책을 적극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남한의 민중운동진영에게 있어 대단히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남북간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남한 내부에는 반민중적 악법인 국가보안법과 전시접수국지원협정과 같은 종속적인 군사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마냥 긍정적인 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남한 당국의 경우 지속적으로 정부를 통한 창구단일화를 고수하고 있는데, 현재와 같이 남한의 대다수 국민들이 배제되어 있는 남북교류및 통일논의는 자칫 반민족ㆍ반민중적으로 흐르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특히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후의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으로 인한 정보의 노출현상은 극복해야 될 또 하나의 과제로 부가된다.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은 서독매스컴의 동독대중 장악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북한은 <흡수통일은 결코 안된다>라는 입장을 계속해서 천명하고 있지만 남한당국과 미국의 적극적인 공세와 함께 북한의 내외적인 여건을 북한을 <제2의 동독>으로 만들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통일논의는 우리들에게 인식의 대전환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남한당국은 과거처럼 <반통일세력>이 아닌것 만은 틀림없다. 뿐만아니라 통일이면 무조건 다 좋은 세상도 더 이상 아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태도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됨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조성범(철학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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