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죄, 대신 속죄한 우장춘

▲좌, 우장춘의 가족사진 ▲우, 우장춘의 연구모습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은 뒤쳐진 농업기술로 인해 식량난에 허덕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짧은 시간동안 우리의 농업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켜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육종학의 권위자 우장춘이다. 우장춘은 세종대왕에 이어 우리나라 농업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우장춘과 달리, 그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매국노였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왜 불태웠으며 그들 부자는 왜 극과 극의 삶을 살게 된 것일까.

  우범선은 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을까?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시대 후기의 무신이다. 그가 매국노로 낙인찍힌 계기는 을미사변 때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시신까지 직접 불태우면서부터다. 그 후 우범선은 친일파였던 김홍집 내각이 몰락하자 일본으로 피신한다. 그리고는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뒤 우장춘을 낳는다. 그러나 은거생활도 잠시,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조선인 고영근에 의해 살해된다.
  하지만 본래 우범선은 그 누구보다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개화에 힘쓴 인물이었다. 그는 중인 출신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별기군 교관이 됐으나 신분의 벽을 절감한다. 그러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와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깊이 심취한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힘을 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우범선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시킨다. 『우범선최후사』에 의하면 우범선은 자신의 행동이 조선의 국정을 쇄신시킬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제국익문사』의 저자인 강동수 작가는 “당대 지식인이었던 우범선은 애국적인 마음에서 시작했으나 매국으로 삶을 마감하게 된 안타까운 인물”이라며 “하지만 우범선의 역사적 전과를 옹호할 수는 없다”고 평했다. 
  아버지 대신 아들이 속죄를
  우장춘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살해당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 가난은 물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심한 이지메도 당했다. 하지만 삐뚤어지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조선인이다”라며 우장춘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했고 항상 바르게 살 수 있도록 힘을 불어 넣어줬다. 덕분에 우장춘은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차곡차곡 경력을 쌓으며 눈에 띄는 연구 결과로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된다.
  우장춘이 육종학의 거두로 성장하자, 1947년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우장춘은 한국에서 배신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힌 줄 알았으나, 조국이 자신을 불러들이자 감격한 나머지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는 즉시 아버지가 배반했던 조국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직장과 가정을 모두 버리고 한국에 왔다. 이 때 일본 정부는 우장춘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우장춘은 직접 한국귀국추진위원회에 연락해 자신의 한국 호적등본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장춘은 한국에 와서도 매국노인 아버지로 인해 사람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원로 언론인 최석채 씨에 의하면 “우장춘 박사는 매국노라는 이미지로 많은 차별과 멸시를 당했지만 속죄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로지 연구에 몰두 했다”고 한다. 우장춘은 어머니의 장례식, 딸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고 연구에만 집중한 결과 여러 우수한 종자들을 만들었다. 그 덕에 한국은 종자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고, 국민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조국을 위했으나 결과적으로 매국이 된 우범선. 그런 아버지에 대한 속죄의 뜻으로 평생을 연구에 힘썼던 우장춘. 이 부자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지만 조국을 위한 마음만은 같았다. 하지만 국모시해사건에 가담한 우범선의 행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강동수 작가는 “다시는 역사의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우범선과 우장춘 부자를 통해 현재 친일파 후손들이 깨닫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혜민 기자  dgr24@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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