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쓴 남자

이방인, 알베르 카뮈, 책세상, 1987
 『이방인』의 뫼르소에게 삶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어느 날 양로원에 있는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뫼르소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다음 날은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마리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저녁 때 집으로 데려와 사랑을 나눈다.
  그에게 삶은 무관심이다.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마리에게 뫼르소는 대답한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비즈니스와 여행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파리 출장을 권하는 사장에게는 결국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같은 층에 사는 레몽이 “이젠 자넨 내 친구야”라고 말할 때도 그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혹자는 그가 삶과 현실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소외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방인의 삶’을 선택했다. 알베르 카뮈에게 삶은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운반해야 하는 시지프 신화와 같다. 무익한 노동을 하는 시지프의 삶이야말로 무의미한 인간 존재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나의 세계, 나를 둘러싼 타인과의 관계는 모두 낯설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뮈는 말한다.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하여 이방인인 나, 긍정하는 즉시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고만이 유일한 구원수단인 나, 이런 내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알기를 거부하고 살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조건, 정복의 욕구가 솟아오를 때마다 공격을 조롱하는 벽에 부딪치고 마는 맹랑한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란다는 것, 그것은 곧 온갖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뫼르소에게 삶은 무의미하다. 동시에 느낀 대로 사는 그의 삶은 강한 욕망의 삶이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한 살인도 그래서 저질러진 것이다. 카뮈는 『이방인』을 연극으로 제작하려는 연출자에게 태양이 가득한 살인이 이야기의 핵심이므로, 살인 장면이 그대로 무대에 드러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은 엄마 장례식 때 울지 않은 뫼르소를 비난하며 그의 살인을 사형집행으로 몰고 가지만, 카뮈에게 뫼르소는 다만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다처럼(거짓말을 하지 않는) 존재할 뿐이다. 
  프랑스 철학가 사르트르는 그의 작품을 이렇게 평한다. “『이방인』은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책도 아니다. 부조리의 인간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묘사된다.” 20세기를 마감하던 1999년, 프랑스의 권위지 <르몽드>는 20세기 최고의 작품 100편 중 『이방인』을 1위로 선정했다. 카뮈(1913~1960)는 수상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박기령 대학원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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