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고&진보

 
  존 레전드, 시스코, 맥스웰, 보이즈 투 맨, 알켈리…. 이들은 모두 R&B(리듬 앤 블루스) 계보에 올라 있는 굵직한 이름들이다. 흑인들의 기나긴 애환의 역사에서 가지를 뻗은 R&B는 시대를 따라 진화하며 어반, 소울을 비롯한 수많은 하위 장르들을 탄생시켰다. 뮤지션들이 주축이 된 90년대 서구의 ‘흑인음악 재기 프로젝트’였던 네오소울 운동이 대표적인 분기점이었고, 이 때의 창의적인 시도들은 과거의 정통 소울을 힙합, 재즈, 가스펠 등의 현대음악 사조와 멋들어지게 섞어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95년 남성그룹 ‘솔리드’가 <이 밤의 끝을 잡고>로 엇박자와 애드리브가 맛깔스럽게 올려진, 리드미컬한 R&B의 매력을 한국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였다. 그 후 자유로운 창작의 메카로 떠오른 홍대 앞에서 R&B는 함께 흑인음악의 뿌리를 이루던 힙합과 재회했다. 감성힙합이 주축이 된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후렴부에 가미된 R&B 보컬들의 피처링은 힙합 리듬 위에 그루브와 서정성을 배가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이름난 인디 힙합퍼들의 앨범에 잇따라 등장하면서 ‘힙합 보컬’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미 유명 싱어송라이터로 다방면의 활동을 펼치고 있는 라디, 프라이머리의 <씨스루>에서 ‘I see through U’라고 외치던 맛깔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자이언티,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할 정기고와 진보는 한국 인디씬을 대표하는 R&B 보컬들이다. 
 
  정기고에게는 이제 ‘마성의 목소리’라는 칭호가 지겨울 법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관련된 대부분의 평론들은 그의 달콤한 목소리를 장황하게 예찬하며 시작된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기교와 속삭이는 듯한 창법, 부드러운 음색까지 ‘가장 보편적인 설렘의 요소’들을 완벽하게 갖춘 그는 이내 힙합 박효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가 써내려간 ‘까맣고 어두운 밤이면 하늘은 그대로 가득 차 있고. 나는 텅 비어있네’(Blind), ‘남들은 다 사랑하고 설레이던, 그 동안 난 그대만 기다린 걸 아나요’(머물러요) 와 같은 담담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가사들은 그 설레는 음색과 만나 윈윈한다. 또한 일렉트로니카 멜로디 위에 R&B를 풀어낸 <그냥니생각이나>, 반전(反戰)을 노래한 곡인 <NO WAR NO CRY>는 그가 현재 가장 넓은 스펙트럼에서 R&B를 소화할 수 있는 보컬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한편 또 다른 실력파 소울 보컬, 진보는 올 여름 케이팝을 R&B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앨범 <KRNB>를 발매했다(무료로 배포한 앨범이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뿌렸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음악을 건네며 R&B를 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는 기특한 사명을 띤 이 앨범에서, 서태지부터 걸그룹까지 케이팝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곡을 진보는 단순히 따라 부르지 않고, 곡 자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소녀시대의 <GEE>를 남성의 시각에서 끈적끈적한 슬로우잼 스타일로 편곡한 <DAMN>, 보아의 <GAME>을 신디사이저와 함께 펑키하게 풀어낸 <LOVE GAME>,  태양의 <I NEED A GIRL>을 재해석한 ‘인도음식 중동음식 타이음식 잘 먹는 여자’가 좋다고 외치는 <I NEED YOU GIRL>은 기존 아티스트들의 ‘무료배포 믹스테잎’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전무후무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정기고, 그리고 진보. 이들은 이미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R&B의 걸출한 인재들이다. 진보는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앨범 <Artwork>로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이듬해에는 정기고의 <Blind>가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로 선정됐다. 한국 가요계의 암흑기로 꼽히는 2000년대 중반, ‘소몰이 창법’의 전신이라는 오명을 썼던 한국 R&B는 실험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디씬의 젊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명예회복의 차원을 넘어, 이 시대를 ‘그루빙’ 하게 하는 장밋빛 영광의 순간을 꿈꾸고 있다.
 

송민진 기자
 blossomydayz@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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