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딴 화가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민음사, 2000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는 친구가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그의 활력소였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감독의 수입은 생활을 보장하지 못했다. 친구는 결국 일반 기업에 입사했다.
  왜 마음의 원대한 꿈을 따르지 않았냐고 탓할 수 없다. 우리도 달(이상)과 6펜스(영국 은화의 가장 작은 단위 :현실)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그런 우리를 더 강하게 유혹하는 것은 먼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바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6펜스다. 꿈꾸는 몽상가가 되기란 100일간 마늘을 견뎌야 하는 곰의 수행처럼 힘들다.
  스트릭랜드는 부인과 아이를 둔 증권 중개인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묘한 배신감이 든다. 현실 이 편에 우리를 남겨두고 저 편으로 그 혼자만 떠나버린 기분이다. ‘나’는 그런 우리를 대신하여 스트릭랜드를 찾아 파리로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그에게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을 퍼붓는다. 
  “이렇게 한다면 세상에선 당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겁니다.” 「그러려면 그러라죠.」 “하지만 당신 나이는 사십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었던 거요.」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
  이 막무가내로 꿈을 밀어붙이는 사내에게, 우리가 현실을 선택할 때 가장 열을 올리는 이유가 최종 질문으로 던져진다.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것을 버릴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생각하기 싫은 결말이 아닐까? 벗어나고 싶은 현실에서 숨죽이며 사는 것, 마음의 꿈을 애써 외면하는 것 모두가 일류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기저에는 나의 의견에 베푸는 타인의 관심을 통해 그 타인에 대한 나의 지배력을 지키려는 욕망이 있다. 스트릭랜드는 그 욕망을 ‘바보’라고 부른다. 
 「정말 당신은 바보군요.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빠져죽는 것이 아니오.」
  꿈과 열정을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예술을 꽃피웠던 스트릭랜드의 삶은 1919년 출판되자마자 많은 영·미 독자에게 강렬함을 주었다. 그들은 오직 그림의 소재인 자연 안에서만 행복했던 스트릭랜드에게 강렬한 영감을 받으며 작품의 실제 주인공인 화가 고갱의 그림을 떠올렸다.
  달의 아름다움을 좇았던 스트릭랜드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짜릿한 전율로 다가온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용기가 필요하다면 달을 땄던 그의 삶을 천천히 훑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기령 대학원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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