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농학과 출신 평범한 직장인에서 독보적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거듭난 김승원 동문

 
  학교 도서관에는 여느 때와 같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각종 자격증, 공무원 시험 등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소리다. 이들 대다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조차 없다. 한때 이들 중 한명이었던 한 학생은 현재 독보적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전설이 되어있었다. 그는 바로 아시아 최초 인터내셔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김승원 씨다. 우리학교 낙농학과 88학번인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대학시절 꿈이 없었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여느 학생들처럼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손해사정사라는, 사실 굉장히 합격하기 어려운 시험을 공부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시험 장사꾼들의 말에 현혹된 학생 중 한명이 나였던 모양이다. 운 좋게 1차는 합격했지만 갑작스런 오토바이 사고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채 취업 시기를 맞이했다”고 말했다.
  자격증 시험에 떨어진 그는 여러 회사에 연구직으로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진다. 그는 “일단 아무데나 취직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업직에 대한 편견 때문에 연구·사무직으로만 지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농약회사에 잠깐 있다가 보험회사 영업직으로 들어가게 됐다.
  보험회사 영업직으로 취직해 상경한 그는 이후에도 자격증 공부를 계속했다. 하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결국 그는 적성에 맞지 않았던 보험 영업직을 그만두고 화학회사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나름대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내면에서는 조금씩 회의감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부푼 꿈으로 상경했지만 다시 지방으로 내려와 농민들에게 농약을 파는 것에 회의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우연히 들은 선배의 푸념이 그의 회의감을 증폭시켰다. 그는 “평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던 회사 선배가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선배를 보니 직장인의 삶이란 게 월급 받고, 조그만 집 사고, 자식 가르치고, 그게 끝이더라. 이런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결국 1년 반 만에 또다시 회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동기들은 다 회사에서  자리를 잡을 시기에 과감하게 회사를 나온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내세울만한 학벌도 없었고, 집안사정이 좋지도 않았다. 이런 내가 남들이 세운 기준으로 경쟁하면 더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뒤지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가치가 있는 자,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많은 스페셜리스트 중 그는 뷰티시장의 성장성을 알아보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의 진출을 택했다. 그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의 길을 선택한 것은 할 게 없어서가 아니다. 나름대로 전략이었다”며 “사람은 누구나 남들보다 잘하는 게 하나씩 있는데 나는 미적 감각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웹디자인 학원의 문도 두드려봤지만 이미 그 계열에서는 날고뛰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그걸 보니 후발주자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당시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독보적인 시장조차 없었고,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전무했다. 그러나 앞으로 뷰티시장이 분명히 발전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 이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로 들어서자마자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속성으로 3일 동안 배우고 시작한 그의 메이크업 실력은 형편없기로 유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상처 만드는 분장, 아나운서 메이크업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메이크업을 하도 못해서 메이크업을 받은 아나운서들은 다시는 내게 메이크업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남자 아나운서 몇 명 정도만 내게 메이크업을 받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복병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수입과 사람들의 편견까지 그를 괴롭힌 것이다. 그는 “처음 일을 시작하고서는 한 달 60만 원 정도 밖에 벌지 못했다. 그 돈으로는 서울에서 생활이 안됐다”며 “또한 당시에는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꺼려하는 여성 손님들이 많았다. 남자가 여자 얼굴을 만진다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든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는 앞으로를 기대하며 스스로 실력을 다듬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하게 당시 상황만 봤다면 나도 견디지 못하고 그만뒀을 것이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단편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스스로 연습하면서 현재 그의 유명세를 만들어낸 셀프 메이크업 스킬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 얼굴에 직접 연습해보면서 셀프 메이크업 스킬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며 “개인이 특별한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고민하고 배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실력을 쌓아나가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크리스챤 디올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우연히 아나운서 대기실에서, 디올에서 남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뽑는다는 얘기를 주워들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디올이 어떤 브랜드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자 아티스트를 뽑는다는 말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시험을 봤다. 운 좋게도 입사하게 됐고, 이렇게 업계 1세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리스챤 디올에 입사한 뒤에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6개월 월급도 밀리는 등 그곳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고용 시스템이 매우 허술했다. 또 매장에서 인사하는 일을 하는 등 백화점 말단사원과 똑같이 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도 아티스트로서 어떻게 특별해질 것인가를 계속 고민했다. 그는 “제품을 만지는 사람인 내가 제품을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메이크업 스킬도 끊임없이 연구했고, 차츰 ‘제품에 대해 완벽하다, 메이크업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점점 실력을 향상해나가던 그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중에서도 독보적인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는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이 제품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최초의 ‘메이크업 트레이너’가 되었다. 이게 입소문이 나서 대만에서도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성과가 좋아 아시아 최초의 인터내셔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최근에는 ‘셀프 동안 메이크업’으로 방송출연을 하며 대중을 지향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해 “전문가로서 여성들을 예쁘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들에게 스스로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고 어렵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려 노력했다. 이런 면이 대중에게 호감을 사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만들어가던 그는 이제 뷰티업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그가 원하던 대로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성과의 원동력으로 ‘부정의 법칙’을 꼽았다. 그는 “긍정을 위한 부정의 법칙이 내 삶의 근본적인 베이스다. 언제나 ‘지금은 아직 무엇이 부족하다. 그럼 어떻게 발전적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끊임없이 나를 쇄신했다. ‘원래 이런 거야’ 식의 태도로는 새로운 혁신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아직 사회에 첫발을 디디지 않은 대학생들에게 멀리보라는 조언을 했다. 그는 “조급하게 바로 성공하기를 바라지 말고 길게 봤으면 한다.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며 “성공한 사람들이 맨바닥에서 갑자기 위로 올라간 게 아니다. 다 과정이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뤄지는 시기가 온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직업을 선택할 때, 무조건 그 직업의 높낮이만 따지지 말았으면 한다. 월급으로 끝나는 인생을 추구하지 말라. 어느 회사에서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직업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지방대 학생들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그는 “많은 대학생들이 시야가 좁지만 특히 지방대 학생들이 갇혀 살기 쉽다. 자기가 사는 세계가 다인 줄 안다. 또한 휩쓸려 산다. 남들 하는 대로, 남들 가는대로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이런 삶은 스스로를 좀먹는 삶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선택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대학시절은 스스로를 찾는 시간이다. 어떻게 찾아갈지는 사람마다 다 방법이 다르지만 중요한 건 자기에 대한 성찰과 고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이 아무리 있어도 이러한 고민과 성찰이 없으면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고 답했다.
  남다른 길을 걸어온 그는 또다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려 한다. 그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에 없는 아티스트 브랜드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실 지금이라도 당장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가는가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남들의 손길이 묻지 않은 블루오션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만들어온 그가 이번에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길 기대해본다.

 

글 / 서아름 기자
 enejwl0103@cnu.ac.kr
사진 / 정충민
 bluesky0876@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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