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귀찮다고 해봐

송민진 기자
사회부/문화부
  단순히 ‘일’로서의 성취감을 배제한다 해도, 내가 직접 기획한 아이템의 숨은 면면을 알아가는 건 충분히 설레는 과정이다. 취재라는 행위의 매력은 나와 어떤 연고도, 면식도 없는 저 먼 도시 어딘가의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의 쾌감에 있다.
  내 호기심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이를 인정받아 타인으로 하여금 내게 시간과 수고를 기꺼이 내어주도록 만드는 것. 이런 뿌듯한 순간들을 거쳐 탄생시킨 기사는 월요일 아침 막 인쇄된 신문을 받아 전부 외울 기세로 읽고 또 읽어도 참 마냥 좋기만 하다. 취재를 성공시키기 위한 설득의 기술. 이는 모든 일에서 항상 마음만 앞서던 내가 기자 생활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다.
  하지만 성취감은 일단 해낸 이후의 얘기, 세상 어디에도 ‘쉽고 간단한 취재과정’을 즐겁게 거쳐 완성되는 뉴스는 없을 테다. 기획기사, 심층취재뉴스의 경우는 더욱 그럴 터. 정말 잘 만들어야지, 매주 야심차게 시작하지만 ‘어린 냄새’ 풀풀 풍기는 대학생 기자에게 바깥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사회부의 취재 로드맵에는 전화를 최대한 빨리 끊고 싶어하는 구성원들을 두고 홈페이지 구석에 해명자료만 잔뜩 업데이트하는 공공기관이 있고, ‘제 소관이 아닙니다. 담당자 연결해 드릴게요’의 과정을 너댓 번 거치는 긴 기다림 끝에 처음 전화를 받았던 사람이 ‘최종 담당자’로 연결되는 웃지 못할 상황을 연출하는 정부부처도 있다.
  한 부서 안의 A직원과 B직원이 나에게 각자 서로의 회선을 연결해 주고, 마지못해 잠시만 기다리라는 응답 끝으로 전화기 너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푸념이 흘러들어오기도 한다. 학생 기자라는 걸 확인한 후에는 눈에 띄게 태도가 달라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에게 ‘어설픈 기자’들이 만드는 대학 신문의 지면 한 구석이란 ‘관리’해야 하는 언론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마주치는 이런 상황에는 낯선 지역에 떨어져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지친 발바닥을 놀릴 때보다 무거운 피로감이 동반된다. 아니, 몸으로 부딪히는 취재는 뛰는 만큼 정직하게 건져올리니 허무한 적은 없던 것 같다. 실태 파악을 위해 노골적인 여성 혐오와 성적 표현으로 범벅된 글들을 꾸역꾸역 읽거나, 작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로테스크한 조형물과 눈싸움을 하는 일들은 비교적 산뜻한 하루 일과가 된다.
  나는 나를 귀찮아한다면 더욱, 나날이, 더 심도있고 진득하게 귀찮은 존재가 되겠다고 또 한번 다짐한다. 납득되는 이유가 있는 정중한 거절이 아닌, 언론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힐 의무가 있는 세금으로 모든 게 돌아가는 곳들에서 지금처럼 종종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된다면 말이다.
  학생 기자를 약자로 취급한다면, 그래서 내가 그 관계에서 힘을 가질 수 없다면 ‘진상’이라도 부려야지 어쩌겠는가. 전국 수백 곳의 대학 신문사, 그곳에서 근무하는 모든 대학생 기자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위치와 역량의 소유자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하나. 나는 나날이 뻔뻔하고 담대해질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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