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부문 가작

  ▲황지우의 시세계

  해체, 그리고 새로운 길찾기

  ⅰ. 80년대와 해체

  '해체'는 80년대 시단의 특징적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해체시, 해체정신, 해체이론, 해체주의등과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해체는 이미 하나의 시적 조류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으며, 시 이외의 문학장르로 점차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해체 경향의 시들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그 형태적 측면에 주목하여 실험시, 형태파괴시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텍스트시, 열린시, 표현시와 같이 어느 한 측면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체시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해체시라는 이름이 단순히 시의 형태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들이 나타나게된 80년대의 사회적 배경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80년대의 "이곳은 말이 통하지 않던 곳"이다. 권위주의적 강권 통치가 횡횡하고 이른바 '벌것벗은 폭력'이 난무하던 그런 곳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 등장한 80년대 시인들은 그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부채에 시달려야 했으며, 때문에 부채를 갚기 위한 시인들의 노력을 현실 상황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한 기존 문학양식에 대한 반항을 동반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비친 기존 문학양식 역시 그러한 현실이 만들어낸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80년대 시인들의 해체적 징후가 싹트기 시작한다.
  즉, 그들의 급진주의적 시창작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 걸친 해체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80년대 해체시의 맥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부채, 억압기제의 산물인 기존 시양식에 대한 반항에서부터 해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해체는 양식의 파괴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체는 재구성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질서의 파괴를 통한 자기부정이며 새로운 발전이다. 그것은 80년 시단에 해체시의 등장이 시적 지평의 확대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체시가 보여준 시 형식의 다양화, 시어 선택의 범위 확장, 주제 및 제재의 다원화 등은 지적 지평의 확대에 기여한 좋은 예일 것이다. 이러한 80년대 해체시의 대표 주자로는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최승자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황지우의 경우는 좀 독특한데가 있다. 그는 다른 해체시인들처럼 시의 형식 및 시어만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내용을 비롯한 언어의 의미체계에 대한 해체까지 시도한다. 이 점에서 그는 다른 해체시인들과는 명백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겠죠.
  황지우의 시적 형상화의 특징은 그가 신문기사, 방송매체의 뉴스, 광고문안, 만화, 악보 그리고 심지어 묘비문까지 거침없이 인용한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특징에 불과하며 사회 현상에 대한 그의 관심 표명일 뿐이다. 그는 표현 양식뿐만 아니라 내용까지도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실험정신으로 치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에게는 해체가 일종의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황지우의 시는 사회비판적 시각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황지우의 해체는 80년대의 시대적 산물이자 사회적 산물이며,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 방법일 따름이다. 이점은 최근의 그의 시가 다시 데뷔시절의 서정시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또한 형식ㆍ방법상으로 모더니즘의 그것에 가까우면서도 내용상으로는 리얼리즘을 닮아 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황지우의 시에 주목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어쩌면 그는 '순수'와 '참여'라는 낡은 이분법적 틀을 깨고 현실을 '시'로써 마주대할 수 있는, 우리시대 몇 안되는 시인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ⅱ현실 극복을 위한 노력

  황지우는 1952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연혁'이 입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나서게 된다. 지금까지 그는 모두 네권의 시집을 출간(83년'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85년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부에로',87년 '나는 너다',90년 '게 눈 속의 연꽃')하였는데, 이 네권의 시집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의 시작 활동의 범위가 다른 시인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다는 점이다. 그의 시창작은 지극히 전통적인 해체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루어진다. 게다가 그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다른 어떤 시인들보다도 세련되며, 또한 탁월하다. 그의 시 속에는 우리들이 흔하게 사용하여 일상언어를 비롯하여 속어, 비어, 은어, 외국어 등 거의 모든 언어가 망라되어 있으며,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마 이러한 점들이 그의 시들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임과 동시에,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보성물산주식회사 장만섭 차장은 무료했다. 그는 거리에까지 들려 나오는 전자 오락실의 우주 전쟁놀이 굉음을 무심히 듣고있다.
  숑숑숑숑숑숑숑숑숑숑
  띠리릭 띠리릭 디리리리리리리리릭
  피웅피웅 피웅피웅 피웅피웅 피웅피웅
  꽝! ㄲㅗㅏㅇ!
  PLEASE DEPOSIT COIN
  AND TRY THIS GAME!
  또르르르륵
  그리고 또다른 동전들과 바뀌어지는 숑숑과 피웅피웅과 꽝!
  그리고 숑숑과 피웅피웅과 꽝!을 바꾸어 주는 자물쇠 채워진 동전통의 주입구(이건 꼭 그것 같애, 끊임없이 넣고 싶다는 의미에서 말야)에서,
  -┌儉代, 서울, SEOUL┘부분
  인용시에서 보드시 황지우에게는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되며, 언어를 비롯한 모든 것이 매체가 된다. 그는 형태 파괴적인 실험을 통해 형식의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형식의 자유로움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지우 자신이 객관적이고 정확한, 그러면서도 냉정한 현실인식에 도달해 있음으로 인해서 가능해진다.
  어떤 이들은 황지우의 이러한 양식 해체, 즉 문학의 기법적인 측면에만 주목하여 그의 시를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형식이라는 일면만을 부각시켜 그의 시를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그것은 '시인이 왜 그러한 시를 쓰게 되었는가'하는 그 의도에 착목하지 못함으로 인해,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측면을 놓쳐버리고 단지 작품의 피상적인 이해에서 그치게 된다.
  그렇다면 황지우는 왜 양신해체를 시도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당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숨김없이 보여주고자하는 시인의 의도에 있으며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인 자신의 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보여주는 요설, 아이러니, 장난기, 냉소등은 시인 자신이 언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를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여주기'위한 방법일 뿐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삶의 언어, 문학평론가 이윤택의 표현에 따르자면 '장터언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다.

  모서의 누이여 용서하라
  나는 왜 이러는지 세상을 자꾸만
  내려다보려고만 한다. 그럴 적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세상이 자꾸만
  짠하고, 증오심 다음은 측은한
  마음뿐이고,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수평이 아니다 승강구 2단
  에 서서
  졸고 있는 너를 평면도로 보면
  (.....)
  生計는 고단하고 고단하다
  뻔하다
  -<95청량리-서울대>부분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황지우의 현실 인식은 객관적이고 무척 정확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수평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을 수직적 위계질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러한 질서에 자신도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자꾸만 내려다보려고만"하는 것이고, 졸고 있는 안내양을 "승강구 2단에 서서." "평면도로"내려다보는 것이다. 여기서 안내양의 처지가 "뻔하다"는 것은 단지 시인의 추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껏 토큰 한개를 내미는 나의 무안함을/ 너는 모르고/졸고 있는 너의 야근과 잔업을/ 나는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의 "무안함도" 안내양에 대한 "모독이며", 시인의 "유사-형제애도" 안내양에 대한 "속죄는 못 된다"는 것을, 시인은 "너무 잘 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지식인이기 때문에, 안내양과 같은 민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들을 "금방 잊는다"고 실토한다. 그 실토는 이윽고 탄식으로 변한다.
  내 失業의 대낮에 시장 바닥을 어슬렁거리면,
  그러나 아직, 나는 아직, 바닥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구나.
  까마득하게 멀었구나.
  나는 탄식한다.
  -<신림동 바닥에서>부분
  그러나 그 탄식은 단순히 감정적인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는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탄식이다. 이로서 시인은 자신과 민중간의 불일치가 엄연한 현실로 존재함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확인 작업을 거친 끝에 민중속에 자신의 존재가 없음을 깨달은 시인은 자연히 괴로울 수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不在의 혐의로 나는 늘 괴로와했습니다."(┌도대체 시란 무엇인가┘그러나 단지 괴로워 하는 것으로 민중에 대한 시인의 부채가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뭔가 속죄를 위한 방법이 필요해지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렇다고 자학적으로 죄송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발 좀 그래라)
  그 속죄를 위해
  악으로 詩를 쓰는 것은 아니다.
  -<같은 絿度위에서>부분
  시인이 속죄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뻔하다. 그것은 시를 쓰는 일 뿐이다. 정작 자신은 "그 속죄를 위해"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럴수록 그 역설은 강한 긍정이 되기 마련이다. 결국 현실의 정확한 인식을 통해 민중속에 자신이 부재함을 깨달은 깨달은 시인은 그 속죄를 위해 시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 나름의 현실극복을 위한 노력에 다룸아니다.

  ⅲ. 양식 파괴를 통한 현실 고발

  황지우의 현실 인식은 상당히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중산층들이 보여주는 부패하고 타락한, 그러면서도 무반성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최근 그는 피혁 의류 수출부차장이 되었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로 주었다. 이것은 그의 수법이다.(...)
  -┌儉代, 서울, SEOUL┘부분에서 처럼 보성물산주식회사에 근무하는 장만섭씨의 퇴폐적이고 동물적인 삶이나,
  (...)제발 무슨 충격적인 일이 없을까? 여자를 개같이 엎드려 놓고 성교하고 싶어. 침뱉을 거야? 추악이 즐겁지? 너를 신고할 테다. 제발 그래 줬으면 고맙겠어. 추악이 즐겁지? 너를 신고할 테다. 제발 그래 줬으면 고맙겠어. 확인해주니까. 확인해 주니까. 확인해.
  -┌이준태(1964년 서울생, 연세대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졸)의 근황┘ 부분에서 처럼, 일상생활의 무료함 속에서 극단적인 자기 비하를 통해 자아를 회복하려는 이준태의 근황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중산층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는 극도의 억압기제 때문이다. 억압적 현실 상황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상생활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색다른 자극이고, 그것은 곧 부패와 타락의 삶으로 연결된다.
  현실: 꼼짝 못함 체형: 부동 자세 경제: 빚더미 교육: 무지몽매 예술: 신서한 거품의 OB맥주 아, 삶: 입구멍ㆍ똥구멍ㆍ오줌 구멍만 뚫려 있음 여기저기에 핀포인팅 종교: 없음.
  -<그대의 표정 앞에> 부분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 무얼 하겠습니까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이제 울음 소리도 없습니다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에프킬라를 뿌리며>전문
  황지우에게 있어 현실은 옴싹달싹 못하는 숨막힐듯한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을 가능케 하는 억압기제로 인해 중산층들은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걷게 되니, 자연히 "여기는 초토"일 수밖에 없다.
  "그 우에서 무엇 하겠습니까"라는 자조섞인 반문이 말해주듯이 현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이며, 사람의 목숨이 "파리목숨"에 불과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이제 울음소리도 없"는 좌절의 땅이다. 그는 "향기속의 살기"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스스로들 이 향기라 믿는 억압기제(여기서는 에프킬라를 의미함)의 산물인 쾌락의 삶은 타락과 부패의 지름길로 자신들을 인하는 살기라는 것을 .

  아아아아 현세의 척추가 휘청휘청
  하다
  아아아아 현세의 다리가 후둘후둘
  하다
  거리는 미래가 안 보이고
  미래가 빤히 보인다
  -<活路를 찾아서>부분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활로를 찾아서'길을 나선 시인의 눈에 비친, 노점상 노파가 '단속반에 쫓기는'모습은, 그가 딛고 서 있는 이 현실 자체가 '휘청휘청'하며 '후들후들'거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그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은 당연히 '안 보이고'이로 인해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미래만 "빤히 보인다."그러한 이유로 인해 시인은,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처넣고 솜으로 막는다.
  (.....)
  나의 살아 남음을 위해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부분
  라는 시구에서 보듯이, 오로지 '살아남음을 위해'귀와 눈과 입을 모두 막아 버리는 '그날 그날의 현장 검증'을 시도하기도 하고, "우리가 사람이란 걸 그만둡시다"('자물쇠 속의 긴 낭하')라는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는 삶도 어느덧 한계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할 것을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는 삶도 어느덧 한계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아 그 무엇, 그 무엇, 더 말 못하겠다, 더 하늘 못 보겠다, 더 땅 못 딛겠다. 꽃이 안 피었으면! 숨을 안 쉬었으면! 치솟아 버렸으면!
  -<천사들의 계절>부분
  (...)못살아 못살아. 들어가면 아내에게 소리지를 거다. 여보, 우리꺼지자.
  南美로, 南牧으로, 우리의 對合地로. 어디든!
  -<그대의 표정 앞에>부분

  어서 가자 魚土를 버리고
  이곳은 온갖 이름과 언약을 버리고
  납세고지서를 주민등록증을 버리고
  오 화해할 수 없는 이 지상을 벗어 나가라
  -<만수산 드렁칡ㆍ2>부분

  위의 시구들은 시인이 탈출을 결심하게 되는 일련의 변화과정들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떠나려고 하는 곳은 "오 力生을 꿈꾸며 새로 태어나고 싶은 물 소리"<草錄와 같이>에서 보여지듯이 '물'의 이미지와 과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율도국에 가고 싶다"<파란 만장>에서처럼 '율도국'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먼훗날 제가 그물을 내린 子宮에서"<雜草>처럼 '자궁'으로 비유되어지는 '바다'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아가서 이것은 시인의 고향인 '솔섬'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황지우에게 있어 '물'의 이미지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묻혀 있는 곳이며, 또한 항상 되돌아 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은 ┌메아리를 위한 梵書┘에서 나오는 '불'과 '풀'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이미지가 혼융되는 공간, 즉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근원적인 공간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삶의 원초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결국 황지우의 탈출은 즉물적 삶의 공간인 현실을 벗어나 삶의 원초성을 확인하려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탈출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각각 자기 자리에 않는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좌절되고 만다.
  나는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쓴다.
  (......)
  한 시대가 가고 도 한 시대가 왔지만
  우리가 우리의 동시대와 맺어진 것은 악연입니다.
  나는 풀려날 길이 없습니다. 도저히,
  그러나,
  한 시대를 감시하겠다는 외로움의 질량과 가속도와 등거리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부분 탈출에 대한 좌절은 시인으로 하여금 즉물적 삶의 공간 그냥 머무르면서 '당대의 유언'으로 시를 쓰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현실에 대한 기록이며, 시인 자신은 혀실과 '등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감시자'인 셈이다. 현실에 대한 기록형식은 다양하다. 그것은 '인쇄효과'나 '동사규칙의 파괴'일 수도 있고, '인용적 묘사'나 '방법적 원용'일 수도 있으며, 아이러니나 풍자와 같은 '거리두기정신'일 수도 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시인이 그러한 형식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이다.
  현실은 '표면'과 '이면'의 통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타성화된 독자들은 단지 현실의 표면만을 인실할 뿐이지 그 이면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다양한 기록형식을 차용하기도 하고, 시적 대상의 표면을 편집, 변형, 재해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전통적인 문학양식의 해체와 재구성은 현실 표면의 해체, 재구성과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 자신이 이야기한 바 있는 것처럼 바로 '파괴의 양식화'이다. 그는 이러한 '파괴의 양식화'를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ⅳ. 상상력과 새로운 모색

  지금까지 우리는 황지우의 첫번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나오는 해체시를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시세계에 문제점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지적될 수 있는 사실은 그의 해체시가 그것이 시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될 형식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현실을 고발, 비판하기 위한 건조한 기록체계를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상, 이것은 필연적인 한계일 수 밖에 없다. 적어도 그것이 다른 문학장르가 아닌 시로써 인정받고자 한다면 풍요로움을 상실한채 단순히 정보제공을 위한 '보여주기'로서의 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나 비판이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지 못하고 단순히 일회적인 고발, 즉자적인 비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계속 반복될 경우 독자들에게 허무주의, 냉소주의만을 유포시키게 되어 시인의 원래 의도는 무색해진다.
  사실 그의 시에 감도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는 시인의 비극적인 현실인식에서 연유된 측면이 없지 않다.
  세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파괴의 양식화'이다. 이것은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일 따름이며, '파괴의 양식화'가 시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사실 '파괴의 양식화'가 거듭되면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그것에 오히려 무감각해지고 되고, 따라서 시인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더 자극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해체를 위한 해체'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고, 그 해체는 상투적으로 변해버려 해체 본래의 정시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해체는 규범이나 법칙이 아닌 미정형의 작업이다. 해체가 양식화될 때, 그것은 이미 해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파괴의 양식화'라는 것은 언젠가는 빠져나와야될 지극히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실상 황지우 자신도 이러한 점들을 인지하고 있는듯이 보인다.그래서 그의 시 양식은 두번째 시집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에서부터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다. 물론 두번째 시집의 경우 '버라이어티 쇼, 1984'와 같이 연상 임지에 의한 자동기술적 해체시도 발견되지만, 그것도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가 데뷔시절에 '연혁'에서 보여줬던 서정시 양식이나, 이른바 선시(禪詩)라고 불리우는 양식으로 희귀하는 것이 바로 그 징후이다. 이러한 변화는 세번째 시집 "나는 너다"로 오면서부터 비교적 구체화 되어 진다. 그리고 네번째 시집인 '게 눈속의 연꽃'은 그것의 결과물이자, 그의 시 흐름 전체를 바꿔놓는 일종의 기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번째, 네번째 시집은 모두 '길찾기'이다. 이 길찾기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이제까지 그의 시가 보여주었던 '파괴의 양식화'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는 길찾기이며, 다른 하나는 첫번째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좌절도었던 탈출을 새롭게 모색하는 길찾기이다. 그것은 반성적 성찰 끝에 시작한 길찾기이므로, 때로는 아포리즘적이기도 하고, 혹은 선사상(禪思想)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한 떠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복합적인 울림으로 다가간다.
  세번째 시집은 사막 속의 길이요, 네번째 시집은 바다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없는 길이다. 현실에는 없고 시인이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길만 존재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길은 현실을 극복, 초월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담은 길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부정의 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경'에서 나오는 산들이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길은 현실을 극복, 초월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담은 길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부정의 길이다. 이러한 사실은 '산경'에서 나오는 산들이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릇 경전은 여행이다. 없는 곳에 대한 지도이므로.! 누가 아빠찾으면, 집 나갔다고 해라."('산경')라는 시구나,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겨울산')라는 시구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현실을 완전히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그 이면의 세계를 동시에 포착하려고 상상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현실과 상상력의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어서도 안되고 또 지나치게 떨어져서도 안된다는 염려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그가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서 상상력 속의 '화엄'과 현실을 동시에 인식하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에서 상상력은 독자성과 자발성, 그리고 능동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 현실인식과의 관계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할 때만이 문학의 개방성과 가능성은 확보할 수 있다. 이것을 황지우는 알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모색, 즉 상상력과 현실을 동시에 인식하려는 그의 노력이 이제껏 그의 시에 내재되어 있던 지식인적 편향과 엘리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 모두 황지우가 가는 길을 애정어린 관심으로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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