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립 위기에 직면한 더빙판

 
  은하철도 999의 메텔, 육백만 불의 사나이… 우리의 유년 시절 속에는 어떤 목소리의 조각이 자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요일 아침 반짝 눈을 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힘이기도 했고, 어린 마음에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게도 하는 설렘이었다. 우리는 흐느끼는 목소리에 따라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익살스러운 말투에 배꼽을 잡기도 했다. 우리의 안방에서 오래도록 함께 했던 세월을 지나 더빙판 외화의 목소리들은 이제 박제된 추억으로 남을 위기에 처해 있다.
 
  대중, 더빙에 등을 돌리다
  2008년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TV 외화 더빙에 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 원음을 그대로 살리고 자막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45.8%로 나타났으며, 현재처럼 성우 더빙 방송을 선호하는 의견은 26.1%에 그쳤다. 오늘날 케이블 TV는 자막처리된 외화만을 상영하고 있고, 애니메이션 장르와 지상파에서 가끔 상영하는 더빙 영화를 제외하면 영화 속 성우들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동원 영화평론가는 “10년 전만 해도 요즘처럼 영화의 더빙이 드물지는 않았고, 어떤 외국 배우의 역할을 어떤 성우가 맡게 되는지도 시청자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모으는 요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더빙은 외면받게 된 것일까. 이는 자막판이 HD기술과 재생장치의 진보로 발전하게 되며 시청자와 제작자 입장 모두에서 느끼게 된 더빙의 한계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자막판을 접하게 되며 더빙판의 전형적인 ‘성우 톤’ 목소리에 거부감을 가지게 됐다. 성우들의 목소리와 어조는 우리가 구사하는 일상 생활의 것들과 판이하다. 이것이 곧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저해하는 요인이 됐다.
  또한 원작에서 배우의 대사 전달이나 섬세한 표현을 더빙판에서 그대로 살리기란 어렵다. 더빙판에서는 원작의 연출 의도와 달리 더빙을 위한 재연출과 작업 방향에 따라 임의적으로 대사나 영화 전체의 분위기나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 단지 대사의 내용 뿐 아니라 배우가 표현하는 배역 특유의 입담과 어투가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더빙판에서는 이것이 배제될 수 밖에 없다. 2008년 추석 연휴 SBS에서 방영된 영화 ‘러시 아워 3’의 더빙판은 이런 이유로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다. ‘러시 아워’ 시리즈의 재미인 주인공들의 빠른 입담과 어눌한 영어 표현 등을 더빙판에서는 전혀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빙이 외면받는 현실에는 경제적인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한 편의 영화를 더빙하기 위해서는 보통 최소 다섯 명에서 열 명 정도의 성우 목소리가 필요하다. 또한 대사의 길이와 음절수가 배우가 말하는 원래 대사와 얼추 비슷해야 하기에 시간이 꽤 걸리는 섬세한 대사 작업을 요한다. 거기에 연출과 스튜디오 녹음 진행, 이를 다듬는 후반작업 등의 다소 번거로운 과정들을 거쳐야 하고 이 과정에서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자막은 자막 번역, 그리고 자막 식자 두 과정만이 필요하다.
  특히 외화의 방영비율이 클 수밖에 없는 영화 전문 케이블 TV의 등장으로 이러한 경제적인 비교우위는 더욱 부각되었고, 자막에 시청자들이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더빙판은 자막판에 점차 자리를 내주게 됐다.
  한국성우협회 신성호 부이사장은 이에 대해 “더빙판을 필요로 하는 시청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는 제작비용의 절감, 자본의 논리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빙, 그래도 사라져서는 안 돼
  하지만 더빙은 영화 산업에 있어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되는 구성 요소다. 속도감 있는 영화에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자막을 노인과 영유아들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또한 시각장애인들의 영화 감상에 더빙은 필수적인 요소다. 자막에 집중하다가 순간적인 상황 변화와 배우의 표정 등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하며, 대사의 복합적이고 섬세한 표현은 자막판에서 최대한 압축되어 간결하게 전달된다. 대사의 내용에 직결되는 이러한 자막판의 특징은 오히려 더빙판의 어투와 억양 문제보다 더욱 크게 영화의 전달력을 저해할 수 있다.
  정제되지 않고 방송되는 외래어와 욕설 또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더빙은 이를 다듬는 과정을 거쳐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순기능을 담당한다. 신성호 부이사장은 “더빙 영화는 우리말을 가꾸며 민족적인 자긍심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실제 프랑스의 영화관에는 반드시 원어와 더빙을 구분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고, 자국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더빙판과 자막판의 전달력 우위를 가리기보다, 두 방식이 상생하며 서로의 약점을 메꿔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한동원 영화평론가는 TV 방영 영화에서 성우 더빙을 어색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며, 대중의 기호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송민진 기자
 blossomydayz@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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