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신행정수도건설 추진위원회 자문위원장인 강용식 동문은 최초로 신행정수도 건설을 제안해 행정도시인 세종시를 명품 도시로 만드는데 이바지했다. 또한 한밭대학교 명예총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자문위원회장 등을 역임하며 뛰어난 행정력과 경영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범위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이렇듯 그가 이룬 업적이 그의 명함 한 면을 빼곡히 채운다. 그런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긴장했을 기자에게 따스한 차를 건네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강용식 동문에게서 너그러운 인품이 묻어나왔다.

  강용식 동문은 1956년 우리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해 학우들을 위해 앞장서는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강 동문은 2학년 때 건축공학과 학회장을 했고, 3학년 때는 공과대학 학생회장 활동을 했다. 이어 4학년에는 총학생회장으로 1년을 지냈다. 그가 학우들과의 소통이 필요한 자리에서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항상 측은지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용식 동문은 “어려운 사람을 보며 그들의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점이 학생회장으로서 소통을 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강용식 동문의 봉사 정신은 대학 졸업 후에도 이어진다. 그는 1987, 1988년 동안 봉사 기관인 국제 로타리 3860지구의 총재를 지내며 가난한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는 ‘사랑과 봉사 정신으로 세계 평화 이룩하자’라는 지표 아래서 1988년 대전·충남의 가난한 학생들 위해 장학금 모금 운동을 벌여 53명에게 80만원씩을 수여했다. 같은 해 한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었던 그는 등록금이 부족해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낮은 금액으로 대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었다.
  한편 그는 나라를 위한 생각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한밭대학교 총장으로 있었던 강용식 동문은 대학교 이전사업을 위해 대전과 충청지역 72곳을 직접 찾아다녔다. 이때 그는 이전 부지를 찾아 돌아다니며 신행정수도가 건설될 자리도 함께 물색했다. 강용식 동문은 “당시 총장회의를 위해 서울로 출장을 가는데 교통량이 많아 차가 정체됐었다.”라며 “과밀화된 서울 인구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신행정수도 건설 이념을 정립한 강용식 동문은 2001년 초 건설의 당위성을 대외적으로 제시하였고 국회에서 이를 받아들여 행정도시 충청권 건설 추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국가 발전을 위한 행보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강용식 동문은 자신이 제시한 원안을 고수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10년 간의 세월을 회상했다. 그는 “세종시민관합동위원회 회의에서 24명 중에 23명이 행정도시가 충청권에 건설되는 원안에 대해 반대했다.”며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안건을 처음 제안한 사람으로서 나홀로라도 원안을 고수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종시민관합동위원회 회의 때마다 건의서를 제출했고 투쟁결과 현재 원안으로 진행되고 있다.  
  강용식 동문은 봉사에 있어서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다. 그는 “직접 복지시설을 방문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활동에서부터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자문위원장으로의 활동까지 모두 봉사의 범위가 될 수 있다.”라며 “국가나 사회,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을 쓴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봉사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강 동문은 개교 59주년을 기념하는 선배들의 모교 방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모교를 방문했다. 현재 우리학교 총동창회 상임고문인 강 동문은 1993년부터 2001까지 8년간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선·후배로서의 역할이 충실해야 학교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는 “선배는 후배들이 사회 각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게 힘을 주어야 하고, 후배는 자신들을 이끌어 주는 선배를 존경하고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강용식 동문은 후배들에게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나가기 위한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는 “대학생이라면 중국어, 영어, 일어 등 3국어는 필수로 하는 것이 좋다.”라며 “세계화 시대에 살아가기 위해선 우리나라의 언어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언어에도 능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효심이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독자로 태어난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어머니를 90세가 넘도록 보필해 대전시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강용식 동문은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이지만 그의 변함없는 봉사 정신에서 굳건한 의지를 배워본다.

안두희 기자
doohee1010@cnu.ac.kr
사진제공/ 강용식 총장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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