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 충대人 Season3

 

  무한 도전. 쉽사리 도전하기 어려운 일들에 겁 없이 뛰어들어 결국은 성공해내고야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우리학교 박경흠(무역·92) 동문의 지난 10여 년에는 결코 무한 도전에 뒤지지 않는 감동이 있다. 맨 몸으로 일본 땅을 밟고 자신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그의 리얼 버라이어티를 들어보자.

  99년은 IMF의 여파로 나라 전체가 요동쳤다.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이 무너지며 대학생들에게는 취업난이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은 학생들이 도서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중앙도서관에는 토익을 공부하는 학생, 공무원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넘쳐났다.”며 지금과 비슷했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당시 많은 학생들은 도서관에 뼈를 묻으며 앞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모두가 값진 노력이지만 천편일률적인 그런 모습들이 나는 싫었고 조금 더 진취적일 수 없을까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다른 곳을 바라보니 다른 것이 보였다. 학교를 통해 일본 큐슈 산업대학으로 1주일 연수를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연수를 다녀오고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일본어를 준비한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에게 유학은 현실이 됐다. “친구들은 모두 말렸지만 떠날 때가 되니 응원을 하더군요, 부모님은 처음부터 오케이였어요. 걱정은 하면서도 아들의 도전을 늘 반기시는 분들이죠.”
  유학길은 고생길이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은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나라지만 당시만 해도 양 국을 오고간다는 것이 무척 어려울 때였죠. 때문에 대부분 유학생들은 뼈를 묻을 작정을 하고 유학길에 올랐어요.” 뼈를 묻겠다는 각오. 하지만 각오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많았다. 특히 일본의 비싼 물가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생활을 힘들게 했다. “집을 구하는 것이 어려웠죠. 전세제도가 없는 일본의 경우 유학생은 많은돈을 들여 월세를 살 수 밖에 없었죠. 그것도 외국인에게는 좋은 방을 주지 않으니 바가지 쓰기 쉽고 그러한 것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불편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니까 오기 전에 충분히 알아볼 수도 있고 요즘은 한인 민박도 많아 훨씬 수월해요. 유학하기 좋은 시절이죠.” 이어 “하지만 아쉬운 것은 조건이 좋아질수록 학생들의 의지는 많이 약해진다는 거죠. 과거에는 정말 악바리 정신으로 버텨야 했지만 요즘은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쉽게 갈 수 있으니까. 그런 정신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그는 일본에 와서도 일본어를 공부해야 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이 기초적 단계라면 일본에서는 고급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랭귀지 스쿨에 다니며 야끼니꾸(음식점)에서 종업원도 하고 신문배달도 했어요.” 그러면서 그는 취업 준비도 했다. 일본 역시 ‘취업난’이 심했지만 그의 취업은 생각보다 쉽게 됐다. “당시 무역진흥공사의 하부기구 쯤 되는 재일기업연합회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취업을 알선하는 사이트를 운영했어요. 그 곳에 이력서를 냈죠.” 이력서에 비결이 있었을까? “다른 것은 없었고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 했던 것을 중심으로 써냈던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 기업 연구회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그 경험을 녹여냈었죠. 그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제는 일본의 중심 도쿄에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그. “처음에 단칸방으로 시작해서 2만 5천엔짜리로 이사를 가고 그 후 5만엔, 9만엔, 10만엔 이제는 15만엔 짜리에 살고 있다. 집의 가치로 인생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일취월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며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유학의 조언은 무엇일까?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을 살면, 대학생활도 풍부해질 수 있고 유학의 시작도 성공적일 수 있다.” 이어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은 좀 더 큰 사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를 인식하고 이 안에서의 나의 활동이 한·일 교류의 가교역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교류의 촉진제 역할을 해야 한다.”
  무역을 통해 한·일 간 가교 역할을 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그는 보다 더 큰 사업을 꿈꾸고 있다.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일본에서의 선교활동도 펼칠 계획이며 북한 지원을 위한 사업도 꿈꾸고 있다. 모두가 좀 더 진취적이고 목적의식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그는 자신도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기복 기자
lkb23@cnu.ac.kr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