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우리는 많은 선생님들과 인연을 맺는다. 누구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마운 선생님 한 분  쯤은 있을 것이다. 단순히 교과서의 수학 공식, 영어 단어가 아닌 내 인생의 조언자로서 때로는 부모님보다 나를 더 잘 알아주던 그런 한 분. 우린 그런 분들을 스승이라 칭한다. 한경문(공업교육·82) 동문은 많은 이들에게 스승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가르치는 것으로 사회에 이바지를 해야한다”는 사명 아래, 배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냐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뛰어드는 그에게서 우리는 참교육의 의미를 발견해 볼 수 있다.
 

   그는 현재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민족 금강 학원의 교장이다. 민족 금강 학원은 해외에 있는 한국 민족 학교로 교포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정신, 우리 문화를 교육하는 곳이다. 이 곳 민족학교는 조국에 대한 배움이 부족한 교포 2~3세들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기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민족 금강 학원은 어떤 의미가 있나?
  - 민족 금강 학원은 1946년 해방 직후 한국으로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한국 교포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기 위해 생긴 곳이다. 당시 조선 연맹(이하 조련)에 의해 건립됐지만 이후 조련이 공산화 되자 따로 분리된 민단에 의해 운영돼 지금까지 왔다. 당시 대부분의 민족학교가 조련에 의해 생겨나 조련이 공산화 된 후 모두 인공기를 달았지만 우리 금강 학원은 민단의 무력시위로 일본 내 민족학교 중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았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자랑스러운 학교이다.

  민족 학교로 온 계기
  - 한국에서 교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고 한국에서 근무 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은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족학교에서의 근무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지원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나는 다른 해외의 민족학교보다 일본의 민족학교의 의미를 더 크게 생각한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경우 대부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의에 의해 교포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본이나 혹은 중국의 조선족의 경우 자의가 아닌 전쟁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교포가 된 사례가 많다. 때문에 그들은 일본인도 아니며 한국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어려운 삶을 영위한다. 그들에 대한 교육은 그 필요성의 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의 민족학교로 지원을 한 결정적 이유는 이것이다.   

  민족 학교의 상황은 어떠한가?
  - 매우 어렵다. 매달 선생님들의 봉급을 주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학교 운영은 한국 학교에 비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보조도 턱없이 부족하다. 세계 곳곳에 위치한 전체 해외 민족학교가 29개이다. 이 29개에 정부가 투자하는 돈은 고작 3백억이다. 29개의 학교가 3백억을 두고 나눠 쓰는 실정이다. 그리고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이곳 학생들에게는 의무교육 제도의 혜택을 주지 않는다. 때문에 이 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은 1년에 3백만원, 고등학생은 1년에 5백만원의 등록금을 내야 한다. 일본의 학교로 입학을 하면 수업료가 전혀 들지 않지만, 교포 부모들은 자녀가 조국의 글과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제적, 생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민족학교로 보낸다. 국가가 감싸줘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풍족하지 못한 예산으로 학교는 점점  더 어려워지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려고 한다. 그는 “만약 돈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내 것으로 그리고 내 능력으로 채워서라도 해야한다.”며 “나는 20년 이상 국가에서 월급을 받아 온 공무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스스로 갖고 있었다. 뼈 속까지 교육자의 피가 흐를  것 같은 그에게 선생님이란 길을 걸어 온 지난 20년은 어떠했는지 들어봤다.

  공업교육과로의 대학진학 그리고 대학생활
  - 서울의 성동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며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 보다는 곧장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학교로 대학생들이 교생실습을 나왔다. 당시 우리 반을 맡았던 교생 선생님 중 한 명이 나에게 “성적도 좋으니 대학에 진학 해 선생님이 돼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다. 그 일을 계기로 공업교육과로 진학을 했다. 당시 공업교육은 충남대에만 있는 특성화 학과여서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게 됐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반드시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녀야 했고 꼭 성공을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했기에 나는 1학년 때부터 공부에 매달려 살았던 것 같다. 술, 담배도 하지 않은 터라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많았다. 그리고 3~4학년 때는 학군단에서 활동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런 이유로 대학생활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그래도 성격은 매우 활발하고 적극적이어서 친구도 많았고 미팅을 통해 여자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공부를 손에서 놓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대학생활에서 누릴 재미를 잃지는 않았다.

   규칙적이고 성실한 대학생활을 한 그는 결국 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서울 지역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는다. 현재는 사범대를 나와도 임용고시를 치르고 난 후 발령을 받지만 당시는 졸업자는 무조건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90년도에 헌법소원에 걸려 사라진다.) 더욱이 졸업자 중 성적이 상위 3%이내의 사람들은 ‘우수 교원 확보법’에 의해 우선 배정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체없이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서울의 경동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잠실고, 온수고를 거치는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교직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야학, 교육자로서의 사회적 책임
  - 대학시절에 횃불이라는 동아리를 했다. 산내리에 야학을 운영하는 봉사, 교육 동아리이다. 그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학군단에 입단을 해야해 중도 포기했다. 결국 3학년부터 할 수 있었던 야학 교사는 해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그것에 대한 미련이 있어 고등학교 재직 시절 야학을 꾸렸다. 지인의 도움을 통해 서울 장안평에 100평의 공간을 마련해 동료 교사 20명과 파랑새 야학을 꾸려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야학은 IMF를 지나며 공간도 많이 협소해지고 학교의 규모도 작아졌지만 현재도 성수동 근처에서 사랑방이란 이름으로 계속 꾸려지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환원하고 싶다는 그의 꿈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 고아원에 있던 사람이 사회에 나오면 연고도, 돈도 없어 결국 그들은 다시  범죄의  길에 빠진다. 이것이 사회적 문제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센터 같은 것을 차려 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수익을 통해 그들에게 용돈도 주고 교육도 하며 그들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꿈꾸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국가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으로, 가르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가르치는 것으로, 땅을 가진 사람은 땅으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
  - 기차가 오고 있다. 티켓을 가진 사람은 기차를 바로 탈 수 있지만 ‘오면 사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기차를 탈 수 없다. 미리 준비하자. 그러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획을 세우길 바란다. 그리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섰을 때는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기복 기자
lkb23@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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