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당 사장 임영진(섬유공학ㆍ73)동문

  아빠가 어릴 적 먹었던 소보로빵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 곳. 대전의 대표 빵집으로 자리 잡은 ‘성심당’은 간판을 내건지 올해로 53년이 된다. 멀리서 기차를 타고 와서 빵을 사가는 단골손님도 있다는 지역의 명소.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맛과 멋을 지키는 이곳의 주인, 임영진(섬유공학·73) 동문을 만났다.

  빵과 함께한 50년
  임영진 동문은 1954년에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함경도에 살다 ‘1.4후퇴’때 남쪽으로 내려왔다. 동문의 선친은 먹을 것이 가장 귀했던 1956년 대전역 앞에 찐빵 가게를 세웠다. 그때가 임 동문이 세 살이 되던 해였다. 성심당 53년 전통은 이렇듯 작은 찐빵 가게에서 시작됐다. ‘성심당’이란 이름은 ‘성인 성(聖)’ 자에 ‘마음 심(心)’자를 써서 ‘성인들의 마음을 담은 집’이란 뜻을 담고 있다.
  신앙심 깊었던 선친은 가게가 성당 앞에 위치하길 원했고 그 뒤 지금의 자리에 성심당이 뿌리 내렸다. 당시 대전의 ‘명동성당’으로 불리는 성당 앞에 자리 잡다 보니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았다.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6.10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때였다. 이때 대전 성당 앞에는 학생들과 전경들이 매일같이 모여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임 동문은 학생들에게 남는 빵을 몰래 갖다 주곤 했는데 당시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일종의 반역이었다. 하루는 가게에 ‘충대 재학생의 어머니’라며 “우리 아들한테 빵을 줘서 너무 고맙다”라는 전화가 왔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 측에서 학생에게 빵을 준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건 전화였다. 결국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도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임 동문은 아버지의 사업을 ‘어쩔 수 없이’ 물려받았다고 했다. 당시 아버님의 연세가 예순을 넘었고 누나가 네 명이 있었던지라 임 동문은 경제적인 이유로 가업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학창시절도 대전에서만 보냈다. 초, 중, 고등학교를 대전에서 졸업하고  1973년 우리학교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 임 동문은 사진 동아리인 ‘디앵글스’의 3기 멤버이기도 했는데 덕분에 활발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빵집을 경영하는 동안 라이벌은 없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가게 바로 앞에 ‘뉴욕제과’라는 서울의 유명 제과점이 들어오기도 했다. “새로 온 전학생이 골목대장을 이기면 그 동네에서 최고가 되잖아요. 듣기로는 뉴욕제과도 그런 생각으로 일부러 우리 가게 앞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고요”.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름대로 뉴욕제과에 대해 조사도 하고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을 것에 대비도 했다. 그 때문인지 결국 손님들은 성심당의 손을 들어줬다. 오히려 경쟁자가 있었기에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품과 비움 그리고 변화
  그의 하루 일과는 9시에 시작돼 저녁 12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난다. 낮에는 직접 가게를 돌보고 오후엔 각종 업무를 보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그가 보여준 일주일 스케줄이 적힌 종이엔 ‘충대신문 기자와의 인터뷰’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등산이나 헬스클럽을 다니며 운동도 하고 있다.
  한편 그는 사회 변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는 20년 째 ‘포콜라레 운동(1943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복음을 통해 사회 혁신을 이루고자 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세상에는 좋아지는 일이 안 보이죠.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자본주의도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도 않고요. 이런 상황에서 좀 더 평화롭고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변화하고 또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는 거예요. 사회적 문제를 생각할 수 없다면 저는 그냥 현실 안에서 빵장사하고 애 키우는 것에 멈추는 사람밖에 안 되잖아요. ‘포콜라레 운동’의 본(本)대로 살면 세상이 정말 좋아지겠다는 걸 느껴요”.
  임 동문은 평소 가깝게 지냈던 한의사로부터 ‘비움’을 배웠다고 한다. 강남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한의사는 많은 것을 버리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의 큰 아들이 고3, 작은 아들이 중3 때의 일이었다. 임 동문은 입시 문제가 중요한 시기에 놓인 두 아들을 데리고, 이른바 ‘교육의 메카’인 강남을 떠난 한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를 따라 ‘마음 비우기’를 실천했다.
  그는 또한 매일 저녁 남은 빵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눠준다. ‘베품’의 미덕은 아버님으로부터 배우게 됐다. “북한에서 나오는 것만 해도 기적같은 일인데 보너스같은 인생에 감사하며 베풀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했죠”. 50년 넘게 이어진 기부, 현재 그는 금액으로 따지면 한 달에 1천만 원 정도 되는 양의 빵을 나눠주고 있다. 이 같은 선행 때문에 2007년에는 ‘선행 베푼 위생업소’로 선정돼 중구청으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김 동문은 어려운 순간에도 위기를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빵집을 한다고 무시를 당할 때나 불이 나는 바람에 가게가 다 타버렸을 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요즘 세대는 고통을 참거나 위기를 견뎌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고자하는 일이 성숙기에 들면 어느 순간 반드시 뿌듯한 시점이 오거든요. 지금은 앞이 안 보이지만 막막하더라도 힘을 내서 어려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 좋겠어요”.

  ‘기업의 사장이니 좋은 차를 타고 다니겠지’하는 사회적 관념이 싫어 20년째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한다는 임 동문. 흔히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즐긴다는 골프와도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에게 가장 맛있는 빵은 파리에서 먹는 샌드위치도, 뉴욕에서 먹는 머핀도 아닌 ‘배고플 때 먹는 빵’이었다. 오로지 맛있게 빵을 먹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십시오”라는 성경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일을 한다는 임 동문. 그는 이미 빵처럼 푸근한 미소로 많은 이들을 좋게 만드는 일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글 / 장애리 기자
 sam2408@naver.com
 사진 / 문수영 기자
 symun@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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