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하형 지진으로 붕괴되는 현대인의 정체성

  언제쯤 이 고통이 끝날런지. 아침 화장실, 나는 예외 없이 개운치 못한 배를 쓸어주며 만성이 된 변비를 성토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곰곰히 되새겨보니, 온갖 약효를 조롱하며 이미 내 생애의 동반자 쯤이 되어버린 변비에 대해 해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우연인지, 재래식 화장실과 함께 자라온 나에게 드물게 경험하던 수세식 화장실은 그때마다 얼마나 '경쾌한'배설의 공간이었던지! 아버지, 우리 아파트로 이사가요, 라고 내가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변비라는 불청객, 혹은 재래식 배설방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나의 욕망이리라.
  그런데 이 '경쾌한 배설'로의 욕망이 과연 나만의 것일까? 현대인의 대표적 주거ㅡ아파트를, 그리고 세척기까지 달렸다는 최신식 좌변기의 상품광고를 소추해보자. 경쾌한 배설이 현대인의 기호이며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단정이 그리 우악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경쾌한 배설을 공감대로 하여 들어서는 아파트의 형식에 의존하며 현대인은 더 이상 자신의 내부에서 생산되고 배출되는 죽음(배설물)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때 아파트를 김현과 같은 어법으로 '뜬집'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뜬 삶'은 과연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물음표 끝에서 나는 두 편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최근에 출간된 '태엽 감는 새 1, 2'(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와 '버려진 아이들의 반란'(무라카미류, 기원전)이다.
  하루키는 이미 국내에 소개된 전작들에서 현대의 일상성에 대한 회의의 정신을 독특한 문장(독특한 배설법?)으로 보여주었었는데, 이번 소설에서 그는 존재의 의미한 '흐름'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카다 도루라는 중년 실업자의 일상이 막혀버리게 되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정신은, 결국 흐름이 중단된 채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일상 속에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성찰의 정신이다. 그런 하루키의 성찰은 나의 변비 증세를 '흐름이 방해받은 탓'이라고 해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대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흐름이 방해 받는 증세로서 변비를 지닌 채 경쾌함의 욕망구조(아파트)속에서, 흐르지 못하고 떠있기만하는 '뜬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가 없이 떠있는 지상 위의 생애란 어느 순간 존재의 부분들이 어긋나거나 일상의 공간들이 비틀거리게 될 때(직하형 지진이 덮칠 때), 진정한 삶과는 '전혀 반대의 세계'에 함몰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죽음(직하형 지진이 덮친 고베시)인 것이다.
  하루키가 그런 소설적 인식을 조심스럽게 상승시키는 쪽이라면, 그보다 공격지향적인 구도를 통해 죽음을 바라보는 지점에 바로 무라카미 류가 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이미 보여준 바와 같이, 그의 작업은 죽음에의 천착이며, 죽음을 현대인의 본연성으로 끌어내리는 공격적인 상상력인데, '버려진 아이들의 반란'도 대합실의 물품보관함에 버려졌던 영아들(coin locker babies)의 성장과 여정을 통해 삶 자체가 죽음의 내재로 역전된 현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류에게 있어서 '우리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그 자체가 지닌 죄'에 대한 동의는 정당하며, 그 정당성을 집약할 때 '이 세계란 넓은 물품보관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들이 그런 인식으로 가는 도정에서 이 세계와의 의사소통의 도구로 선택하는 '다튜라'라는 파괴적인 물질은, 그 파괴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에 의하여 '도쿄를 순백으로 만들어버리는' 구원의 임무를 부여 받으며, 마침내 '모든 인간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선언을 실현시키는 촉매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정체성 분실에 대한 류의 선언으로부터 과연 그 누가 벗어날 수 있을런지.
  아하, 그렇다, 죽음이다!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선하는데 열성적인 현대인들의 은밀한 욕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내부에서 끝없이 배설되는 죽음(배설물)을 외면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동의의 확산이 아닌가. 그러나 거대한 수세식의 정화조 시스템이 죽음을 정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흐름을 방해하고, 정화조라는 물품보관함속에서 죽음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두 소설이 말하는 점이다.
  재래식 화장실은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 이 글의 제목을 빌려준, 또 다른 소설가인 다자이 오사무는 현대의 언저리에서 다섯 번의 실패 끝에 자살을 했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데, 이미 죽음을 내재한 현대인의 정체성에 이르는 길은 또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대인이 사회의 온갖 구조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채 떠도는 이상, 죽음은 이미 다가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예측과 방재가 가능하다는 수평형 지진이 아닌, 예측을 파괴하고 인간의 의지를 선점해버린 직하형 지진의 모습으로 삶을 포획한다는 것이다. 직하형 지진앞에서 현대인이 믿었던 수세식 정화조의 시스템은 감추었던 배설물(죽음)들을 토해내고 말터인즉.
  나는 다시 여전히 개운치 못한 아랫배를 쓸어주고 있다. 결국 나는 '자신의 내부에 하나의 내장으로서 지옥을 키워가는' 인간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그 지옥같은 내장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의 배설물을 이제 당신의 배설물과 동일한 그것이다. 당신과 나, 그 누가 '정화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어느 누가 나에게 재래식 화장실을 옳게 개선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런지.
  이 변비의 고통이 언제쯤 끝날까? 이제 나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예감과, 또 다른 정신적인 변비를 체험했다는 자책만이 착독(착취적 독서)의 대가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상직(행정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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