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남명진 교수

 “연구실을 다 치워서 아무것도 대접할게 없어 어쩌나~”하며 기자를 들인다. 정년퇴임을 준비하느라 연구실을 정리한 탓에 연구실은 썰렁했다. 텅빈 낡은 책꽂이에서 지나온 세월이 보인다. 남명진 교수는 우리학교 철학과 63학번 출신으로, 81년부터 재직해 올해 정년퇴임을 하고 명예교수로 학교에 재직한다. 옛 기억들을 차곡차곡 꺼내느라 그랬는지 그와의 대화에서 오래된 책냄새가 났다.

 
 42년 간의 세월
 남명진 교수가 철학을 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당시 상황이다. 60년대 초반 4.19, 5.16 등으로 어지러운 사회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알면 이렇게 어려운 삶을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선배의 인도였다. 당시 우리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이 남 교수의 아버지가 훈장으로 있던 서당에 다녔는데 고등학생이던 남 교수에게 ‘너는 한자를 잘 아니 동양철학을 하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또한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철학 교수인 고(故) 이정호 교수가 우리학교 총장이라는 사실은 그를 철학과로 이끈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유학으로 떠나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 42년 동안 충남대와 함께 했다. 그동안 학교 안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가장 크게 느끼는 변화는 학생들의 ‘사람과 관계맺는 태도’다. 인격 대 인격으로 사람을 대하기보다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사귀고 끊는 경우가 는  것이 안타깝다. 또한 학자들의 ‘이기적 태도’에도 일침을 놓는다. “학문은 그 자체가 진리이지 자신의 영역으로 생각해서는 안되지요”라는 말은 학문을 대하는 그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또한 그는 현대사회에서의 ‘순수학문 경시 현상’에 대해 경계했다.
 “순수학문을 탄탄히 해야 다른 학문의 발전도 있는 것인데 수요자에게 인기없는 학문이라 해서 기초를 무시해서는 안되지요”.

 충대신문 국장 출신
 남명진 교수는 1968년부터 73년까지 충대신문의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학생기자가 국장을 맡지만 전에는 조교가 학생 지도 차원에서 국장을 맡아 일하는 체계였다. ‘자리가 비어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국장을 하게 됐지만 그 때의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신문 제작에는 기사 작성보다는 조판과 인쇄에서의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는 신문이 열흘에 한 번 나오는 순(旬)간이었는데 발간 주기는 길었지만 제작에는 항상 시간이 모자랐다. 일일이 활자를 놓아 인쇄를 해야 했던 신문 제작은 판 짜는 것과 인쇄만 치더라도 거의 열흘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외의 기간에는 편집회의와 취재를 해야 해서 일정이 바빠지는 건 당연해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당시에는 수지가 안 맞는다고 일간 신문사에서 인쇄를 안 해줬지. 개인인쇄소에서 하는데 거기 직원이 한 명이라 그 분이 아프면 신문 인쇄도 늦어지고 그랬어요”하고 “기자들 얼굴에 잉크가 묻고 아주 고생을 했지요”라며 그 때의 힘들었던 기억을 풀어 놓는다.
 편집국장 출신인 남명진 교수는 지금의 충대신문을 어떻게 생각할까? “독자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예전과 다르지 않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편집국장이 글을 쓰는 란인 ‘밀물썰물’이 지금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지금 신문의 컴퓨터 편집을 ‘천지개벽’이라 말하는 그에게지난 세월의 나이테를 읽을 수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나는 충대맨”이라고 말하는 남명진 교수는 정말 우리학교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문화동 캠퍼스에 대해, 또 신문의 활자 인쇄에 대해 얘기하며 “학생이 알지 모르겠네. 너무 옛날 얘기라서……”라는 말을 종종 붙이며 이어가는 그의 말에는 충남대 그 자체가 담겨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학문을 탐구하며 후진을 양성하니 교수란 직업이 참 보람있다”며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을 천직이라 말하는 남명진 교수. 명예교수로서의 앞으로의 날들도 기대가 된다.

 오소영 기자
 ohsor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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