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대문학상 평론부문 당선작 -이정록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소재의 모색에 있어 90년대 젊은 창작인들은 두가지 경직된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봐진다. 그 첫번째 태도는 젊은 패기의 필수항목인 실험정신의 모색과정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실험정신은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통하여 시의 영역밖이라고 생각되던 부분까지 시 속에서의 수용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넓혀진 영역에 대한 꾸준한 의미 천착의 자세는 이에 뒤따르지 못하는것 같다.
 실험이라는 이름 하에 기성의 것과는 다른 소재를 끊임없이 추구해보지만, 그것은 단순하게 새로운 소재의 나열 이상의 의미 획득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들이 아주 많은 것같다. 그것들은 마치 두더지가 밭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간 흉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지나치게 경박하거나 가벼운 모습으로도 다가온다. 그 두번째 태도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으로 옹호되는 패러니다 패스티쉬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것은 존 바드가 '고갈의 문학'이라고 말했듯, 취할 수 있는 모든 문학적 가능성이나 형식이 이미 다 추구되었기 때문에 현대를 모든 소재나 형식이 극도로 탕진되었다고 보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발행한다. 그래서 어느때보다 소재의 고갈을 느끼는 현대에는 기존의 것을 다시 짜집기하고, 또는 덧씌우는 양상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소재 자체가 작품 속에서의 주제드러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라면 그 모색은 아주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할 것이다. 이에 나는 93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한 이정록이라는 신인의 시를 통해서 젊은 창작인들과 문학도들의 소재 모색 자세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정록은 94년에 첫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를 발표했다. 그 시집에는 몇가지 소재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이 가해져있는데 나무, 집, 이웃, 황새울(작은 농촌마을)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 소재들은 전통적이라 할 만큼 진부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이런 소재들이 시 속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런 이정록의 자세 속에 젊은 창작인들에게 부족한 어떤 면이 숨어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시가 다루는 제재는 특성사물이나 자연물을 빗대어 말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그중에서 나무는 그가 아주 빈번하게 다루는 소재다. 서시에 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언뜻 시집을 읽어보더라도 소나무, 회화나무(과목), 참나무, 콩칡뿌리, 탱자나무, 은사시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 아주까리, 향나무, 노간주나무등 아주 다양하다.
 
 마을 가까울수록 / 나무의 흠집이 많다'서시'

 내관에서 쓰일 나무 한그루 / 어딘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나무한 그루'

 잘 커오른 나무 / 기계총처럼 베어내고 / 가장 따스한 땅에 묘를 쓰지만 '응달은 넓다'

 인용시에서 나타난 나무들은 인간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측면에서 서술되었다. 서시에 나타나듯 마을(인간의 삶의 현장)이 가까울수록 더욱 상처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인간들은 이 나무를 어떻게 황폐화 시키는가? 그것은 죽어서까지 관을 만들고(자신의 죽음에까지 외계자연의 생명을 안고 들어가는면) 양지바른 무덤하나를 만들기 위하여 잘 커오른 나무를 기계총처럼 베어내기도 한다. 이 때 나무는 자연에 대한 일종의 대유인 셈이다. 이 자연은 인간생활과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활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이는 자연과학에서 바라보는 물질적인 세계관으로 인간의 필요에 따라 파괴되고 변용될 수 있는 가변성을 지닌 자연이다. 이를 통해 이정록은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자연황폐를 일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들은 많이 닮았다 / 그늘 넓은 잎이며 / 고개 내밀어 뽐내지 않는 작은꽃'아주까리'

 여기 텃산 소나무숲에 서니 / 솔방울 하나 흘리지 않으려는 / 우리들 세상살이도 보인다'버림에 대하여'

 마음만 깊은 아버지의 나이테에'한식'
 
 이정록의 시에는 나무는 인간의 파괴에 의해서 굴복되고 파괴되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황폐를 일삼는 자리에서 심상치 않는 각성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의 획득으로 이어진다. '아주까리'에 나타나듯 이 세상의 자연은 홀로 외떨어져 있는, 인간 이기심의 적용대상을 넘어서 인간과 항상 연관을 맺고 서로 영향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텃산 소나무 숲에서 솔방울 하나 흘리지 않으려는 우리들 세상살이를 발견하는 모습이 그러하며, 시인의 가장 가까운 대상인 아버지의 모습을 나무의 나이테에 비유한 것 역시 인간과 자연과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곳이다. 그러니깐 나무는 인간의 자아가 확대된 부분이고, 이지점에서 자아의 세계화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기반에서 나타나듯 인간의 자연황폐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피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또는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셈이다. 이처럼 이정록은 나무를 통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변용을 지닌다.
 이러한 인간과 나무의 동일성은 나무가 가지는 하늘 지향의 상승의지를 통하여 또 다른 상상력으로 변모된다. "온몸으로 사랑해 줄 상수리 단단하다" '참나무', "열매보다도 가시를 키우는 큰 뜻" '탱자나무의 말", "단단한 그 무엇을 쥐고 있구나" '은사시나무'와 같은 부분은 외계의 압력이 크면 클수록 더욱 악착같은 꿈을 간직하는 우리네 삶으로의 치환인 동시에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이런 상상력 자체는 열거된 나무들의 장점을 닮고자 하는 시인의 욕구인 바, 이는 자연과 인생을 일원화시키려했던 고전주의 전통과 궤를 같이한다. 이정록의 시에 나오는 나무는 인간의 자연황폐라는 기반속에 인간과의 동질성획득 및 인간의 자연모방이라는 태도로 변용되고 있다.
 이정록시에 나무의 이름만큼 동물들 역시 대거 등장한다. '새, 벌레,  염소, 멸치, 매미, 닭'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동물들은 그 나름 속성을 지니고 역할을 소화해낸다.
 
 그 작은 몸 전체가 단단한 사랑이었음을 / 가슴에 새긴다 새가슴과 새대가리라는 / 우리들의 오만한 언어를「새」

 사랑하는 그대, 가슴속 / 사과밭으로 날아가는 나는 / 한마리 가을새 '사과밭으로'

 동물시에서 이정록의 출발을 일상생활 습관에 대한 반성에서부터다. 새의 단단단 사랑을 확인함은 인간의 언어습관에 대한 반송을 하게끔 하는데, 이런 반성에 기초한 그의 동물관은 나무에서처럼 동물과 화자의 동일시로 이어진다. 이 동일성은 '사과밭으로'의 화자와 새처럼 대상과 배경과의 갈등이 없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래에서처럼 배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변모되기도 한다.
 
 고삐는 최대한 당겨서 / 원을 그린다 염소는 / 작은 발굽을 부지런히 움직여 / 수렁의 숨가쁜 길을 낸다 속이 타는듯 '염소'
 
 그물은 넓고 그물코는 너무 작아 / 갇혀서도 자유로운 듯한 우리들, / 한올의 물보라에도 돌아서지만 / 누군가 벼리를 조이며 / 우리의 주리를 틀고있다 '멸치'

 캠퍼스처럼 말뚝을 중심으로 고삐를 최대한 빳빳하게 당겨 원을 그리는 염소의 고집, 꼬리를 휘어보지만 넓고 촘촘한 그물코를 빠져나갈 수 없는 멸치 등은 문맥속에서 평범한 시적 대상물 이상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들은 시의 중심으로 침투하여 인간들의 모습으로 상승된다. 아니, 인간들이 동물의 모습으로 비하된다. 이 동물들이 외적 폭력(고삐, 그물)에 매여 있다는 공통성을 지니는데, 이것은 외부세계의 폭력에 의해 매여있는 인간선 발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벼리를 조이며 주리를 틀어오는 폭력 자체는 인간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지 않는가? 여기서 이정록의 동물시는 알레고리로 읽혀진다.

 눈을 뜨고 지금 죽는것이다 / 살아남는자로 하여금 / 치뜬 눈 감기게 하는 것이다 / '멸치'

 배경으로 제시된 폭력 속에서 멸치는 죽어간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살아남은자의 눈을 감기게 하는 강한 울림을 가지는 죽음이다. 이정록의 동물시는 일차적으로 인간세계를 환기 또는 동일시되지만, 그 동물들은 단순하게 사람을 닮은 모습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 동물들은 다시 인간세계에서 사고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이차적인 참여의 몫을 해내는데, 이러한 의미확장의 알레고리 시가 취하기 쉬운 굳은 경직성을 뛰어 넘어 그의 시를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여러 동물들이 한편의 시에서 대거 등장하여 화자의 심리 대변을 하기도한다.

 그대 보고 싶을수록 / 늪이 생각납니다 / 늘 젖어 있는 뿌리 / 비늘 마다 물이끼 푸르른 물고기들 / 지느러미를 세운 채 알을 낳고 / 넓은 이파리 위론 / 배때기 하얀 개구리가 / 깜짝 뒷다리를 감추는 여름 오후, / 하늘 한 자락 / 콱 베어물고 우거지는 늪 / 깊은 가슴을 생각합니다 / 내 마음 속, / 악어의 이마가 펄펄 끊습니다 '해열제'

 이 시를 그대로 향한 연시로 파악하기에는 화자의 심리 대응물로 등장하는 물고기, 개구리, 악어는 사랑과 거리를 가지는 비친화적인 것들이라는 무리가 따른다. 이 매체들은 사랑과 유사성보다는 차이성이 훨씬 더 크다. 하지만 문맥속에서 매체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게끔 만듦으로써(가령 개구리가 배를 뒤집는 거라든지, 악어의 이마가 끓는 다는 것) 그것들의 혐오스럽고 추악한 기존 인식은 소멸된다. 징그럽고 무서운 것들도 그에 걸맞이 않는 행동을 하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일 때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문맥 속에서의 거세효과를 통해 그 매체들은 사랑과의 유사성이 획득되어지는데, 이 점에서 이 시는 휠라이트가 말하는 병치비유의 요소가 들어있는 시로 파악된다. 그런데 물고기, 개구리, 악어와 같은 동물들은 흔히 인간이 건강식이라고 칭하는 것들이다. 육지에 상륙하기 이전 단계인 이 동물들은 원시적이고 강렬한 생명력을 상기시킨다. 그대가 늪을 상기시키는것 역시 강한 성 이미지의 환기다. 이 대목에서 인용시는 성의 구애시로 읽힌다. 화자의 심적대용물인 동물들이 성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은 상실된 원시적인 삶에대한 갈망으로도 파악 가능하다. 이처럼 그의 동물시는 동일성 확보를 통해 인간생활의 우의와 풍자, 그리고 원시적이고 넘치는 생명력에로의 심정 표출대용물이라는 변용을 가진다.
 이정록의 시에는 집에 관련한 시편들이 제법 있다. 원래 집은 인간의 외피이자 보호막이었다. 가족단위로 구성되어지는 그곳에서 인간들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더위와 추위를 피해 아늑한 생활을 한다. 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생활의 3대 필수조건인 의ㆍ식ㆍ주안에 집은 빠질 수 없는 것이다. '길거리에 쫓겨나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으로서 갈 때까지 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연속에 있는 동물의 집을 빼앗는 대신에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동물들의 보금자리까지 차지하면서 건설한 도시에서 인가들에게 아직까지도 집의 수요는 부족하다. 문명이 이기를 누리기 위해 도시에 집중된 인구를 따라잡기에 도시에 공급된 집의 수효로는 어림없다.

 이삿짐을 싸는 날 / 먼지 켜켜한 장롱 뒤에 / 풍선 하나 숨어 있었다. '풍선'

 연탄가스 심한 월세방에서 / 드디어 전세로 옮긴 아내는 / 보일러 작동법을 배우며 목련꽃처럼 웃는다 '집'

 대개가 맞벌이인 부모들은 / 아이들의 목에 열쇠꾸러미를 매달아 주지만 / 보이지 않게 걸어 준 부모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 헐렁한 런닝구 밖으로 세상을 엿보고 있다 '열쇠목걸이'

 우리의 도시에는 무주택자들이 득실거린다. 화자 역시 무주택자이다. 터무니없이 오르는 전세값에 떠밀려 그도 매번 이사를 간다. 도시의 소시민이 그러하듯 그도 월세방에서 전세방으로, 연탄 아궁이에서 기름 보일러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주택자다. 그 역시 번듯한 집한채를 위해 평생을 노동해야하는 데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집이란 도시에 거주하는 소시민들이 평생토록 노동을 통하여 통과해나가야 하는 이니시에션(통과제의)처럼 되버렸다.
 동시에 작업복을 갖고 평생 일을 하는 목적이 번듯한 자기집 한채를 갖기 위함으로 노동의 의미는 격하돼버렸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집을 확보하기 위하여 젊은 부부는 대개가 맞벌이 부부가 되어 집을 비운다. 그만큼 빨리 자기집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의 아이 역시 밖으로 나오는데, 시속에서 헐렁한 런닝 밖으로 세상을 엿보고 있는 열쇠의 모습은 부모의 부재를 증명하는 징표와도 같다. 이때 집의 의미는 인간의 거주지이자 보호막이라는 의미를 떠나서 인간의 노동을 억합하고 종용하는 수단으로 연기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집은 도시의 소시민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나가야 할 우상의 자리르 차지하고 소시민들을 직장 속에 묶어놓는 도구가 돼버렸다. 집은 이 시대에 와서 거주라는 본래의 의미를 떠나 재산의 증식과 부의 과시라는 상품으로 되어 버렸다. 이사 도중 그가 장롱 밑에서 발견하는 풍선의 모습은 이 상품의 무게에 눌려 바람이 빠지고, 또 그 상품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남작해져서도 안되는 시인 자신인 셈이다. 이렇게 발견된 자기 정체성은 집의 무게에 눌려 신음했던 자신의 젋음에 대한 각성과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요인이 된다. 그 시각은 다음 시에서처럼 매우 미시적인 관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처음부터 자기집이었으므로 /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 집 한채식 갖고 산다 / 벌레의 방은 참 아늑하다 '혈거시대'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들의 집이라고 만든 시멘트구조물 구석구석에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한다. 번식력이나 환경적응력이 강하여 인간생활에 기생할수 있는 바퀴벌레나 쥐같은 것들은 어엿하게 그들 나름의 집을 꾸미며 살아간다. 대물림도 하고 집단장하는 모습이 시인의 시각에 포착되는데, 걱정 없이 새끼 칠 수있는 벌레의 집(방)은 전세값, 월세값이 떠밀려 이사해야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비해 아늑할 수 밖에 없다. 인간들도 걸리버처럼 몸이 작아져서 벌레 같은 생활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언어유희에서 시를 출발시키는 다음의 시에도 같은 입장을 유지한다.
 
 아가미와 올가미를 / 나란히 써놓고 오래 바라보면 / 올가미는 커다란 아가미가 되고 / 아가미는 큰 올가미 아래 모인 / 수많은 사람이 된다 '사슬'

 위 시에서 아가미와 올가미의 의미가 끊임없이 연기되는 가운데 이 시대의 우리 삶속에 깃든 인식의 허위를 뒤집어 놓고 있다. 산 자가 살기 위해서 아가미가 필요하지만, 그 아가미는 산 자의 숨통을 죄여오는 올가미가 된다. 그 올가미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서 다시 아가미를 벌려야 하는 관계가 마치 사슬처럼 얽혀 있다는 시인의 발견은 이 시대 우리의 삶의 양상을 꽤 적적한 연어유추를 통해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시 속에서 시니피앙이 확정되지 않고 사슬처럼 의미가 연기되는 것은 집의 상징과 연계하여 의미를 추적할 수도 있다. 즉 아가미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집으로, 올가미는 그 집의 확보에 평생을 바치는 전도된 인간행위로 파악될 수 있다. 복잡다난한 인간관꼐는 아가미를 위해서 올가미의 선택을 기피할 수 없게 한다. 아가미를 위해서 올가미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벌레의 방은 아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황새울 연작은 23편으로 이뤄졌다.(시집에는 따로 번호를 달아놓지 않았으나 해석의 편의상 적힌 순서에 따라 숫자를 붙여 구분토록 하겠다.) 자서에 드러나듯 황새울은 차령산맥의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그 마을이 얼마만한 규모를 가지고 그 마을 주민들은 어떤 업에 종사하는지 알 수 없으나, 시집속에 나타난 황새울의 모습은 이 시대 전형적인 농촌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동부 같은 팔순의 속살 / 콩 한 소쿠리 토방에 널 때 '황새울 2'

 갑각절의 운명을 등에 진 늙은 농게들 썰물의 들판을 걸어 나온다. 그중 젊다는 마흔 살이 지게를 건네받는다. '황새울23'
 
 삽날 한번 부딪지 않으며 / 시멘트를 비비다 보면 / 하, 이런게 찰 떡 궁합인데 / 장가 못 간 우리들 '황새울20'

 이제 불알 친구들의 나이 차이는 / 열살도 넘는다. '황새울22'

 이렇듯 황새울의 주구성원은 늙은이들이다. 늙은이의 이빨처럼 다빠져나가버린 젊은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늙은 농게들은 말문을 잃어가지만, 팔순이 넘어서도 콩을까는 부지런함을 보인다. 썰물의 들판을 걸어나오는 늙은 농게들의 지게를 건네받는, 개중에 젊다고 하는 마흔살. 그렇게다로 남아있는 젊은 40대는 어떠한가? 그들은 장가를 가지 못하고 저들끼리 찰떡궁합인지 어떤지 위로하며 살아간다. 이런 중간층의 부재는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같이 놀아줄 이가 없는 농촌 현실에서 열살 터울은 친교의 대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황새울에는 도시에서 보던 집의 양상이 아주 다른 모습을 나타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한 채 / 언덕을 이루기까지 /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황새울21'

 집이 무너졌으나 사는 사람이 없기에 다칠사람이 없다. 도시의 가옥이 무너졌으면 사상자는 물론이거니와 무너진 집의 잔해를 치우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새울의 빈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집의 잔해는 썩어서 언덕을 이룰때까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 집은 마침내 언덕의 흙이 될 것이다.

 종산마저 없으면 / 밭머리를 자르거나 /둑을 넓혀 무덤을 쓴다. '황새울 7'

 무성한 칡넝쿨 아래 / 스러지는 무덤들 '황새울 12'

 우연찮게도 황새울에는 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덤만 무성하게 늘어난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산 층층이 자리를 차지하던 밭의 자리는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고 그 자리에 녹음이 우거지거나 또는 묘가 자꾸만 늘어난다. 이전에는 산중턱너머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묘자리가 점점 인가와 가까워지고 갈수록 그 수효는 늘어난다. 이렇게 황새울에는 젊고 생동하는 것들은 떠나가고 병들고 소멸되는 것들이 한뼘 묻힐 자리를 찾아온다. 황새울은 버려짐과 아스라지는 이미지로 차있다. 이런 현실은 비단 황새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정록은 죽음과 소멸을 그것만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녀석도 썩으면 거름이 될까 '황새울 16'

 그렇다. 이죽음은 썩어서 거름이 된다. 곧 죽음은 또 다른 생명으로의 이어짐인 셈이다.

 <7면에서 계속>
 <6면에 이어>
 황새울의 늙고 썩어가는 것들이 도시 젊음들의 식사를 재배하고 공급하는 생산의 모습으로 시에서 자리매김한다. 우리가 죽었거나 삭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썩어서 생명이 된다. 그것은 문명의 국외지라고 할 수 있는 농촌에서 이뤄진다. 이 농촌은 도시와 철저히 대비되는 바, 생산활동이 도시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을 향하여 '도시는 어쩌면 불임의 젊음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은 것들로 인해 살찐다. 모든 살아있음은 죽음으로 인해 가치롭다. 죽음이 없었던들 도대체 우리의 생명은 가능하기라도 했을 것인가? 황새울은 죽음의 상징물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재생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정록의 이런 자세는 가끔 60-70년대로 시인이 끌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끌려감이 아니다. 그는 과거로 끌려가는 것 같지만, 60-70년대를 현재의 시점으로 끌어오기도 한다. 그 끌어옴을 통해 시인은 이러한 이웃의 삶을 통해서 오래된 것에 묻어있는 따뜻함을 무시하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되묻고있다. 같으 장소에 존재할 수 없는 사물들을 결합시키거나 사물을 원래의 장소에서 추방시키는 데뻬이즈망의 자세가 우리 주변의 사라져가는 것들의 멸종을 더욱 종용하지는 않았는가? 이종록의 시는 대체로 가지런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그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지켜내고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지켜내고 있는 안정감에서 기인한다. 소멸과 현실적 상실을 끌어안는 포용의 자세가 사라져가는 이것들을 지금까지 버텨내게 하는 힘일 것이다. 그의 소재는 이 시대에서 비껴나고 있지만, 비껴나지 않도록 그가 이 시대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안간힘. 다른 사람들은 놓치고 있지만, 그기 놓치지 않는 팽팽한 끈은 현대적 양상에서 낯설게 두각되어 긴장감을 획득하는 요인이 된다. 그는 우리네 삶의 정다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꾼인 셈이다.
 그의 시에는 주변 이웃의 삶을 다루는 소재들이 많다.

 몰아치는 누더기 비바람을 제일 먼저 맞아야 하는 낡은 널빤지나 종이 박스도 헌 책처럼 황인종이다. '헌책방털보씨'

 대장간 이씨 앞에 서면 / 찬물을 만난 불달은 쇠처럼 / 짱짱한 숨쉬기로 살고 싶다 '담금질'
 
 이 시대의 상징처럼 다리를 절지만 / 수입코너 앞 쓰레기통에서 넥타이까지 졸라맨 그는 신사다... / 하늘에게 땅에게, 거지 아닌 사람은 없다 '근하신년'
 영락없이 아이들은 질척이는 탄맥이다 / 평생을 캐낸 한숨의 석탄위 / 땟국물 흐르는 아이들만 아직 폐광이 아니다 '요강'
 그의 이웃인 털보나 이씨, 고물상 주인, 거지, 탄광촌 막부들은 모두 90년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옛것에 집착하는 만큼 현재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한결같이 현실적 생활 능력을 상실한 존재들이다. (실제로 시속에서 털보의 아내는 겸업으로 옷수선을 하고 , 탄광촌의 여인들은 짙은 화장을 한다. 또 거지는 길거리를 전전하며 빌어먹고 있다.)하지만 시인은 상실을 상실만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들어 놓고 그 속에 온기와 애정을 불어 넣는데, 이정록의 이런 자세 속에서 긴장이 발생한다. 그의 시에서 우리 곁을 떠나는 이웃들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외연을 형성한다면, 그것을 부여안으려는 시인의 자세는 내포가 되어 뺄 수 없는 힘과 진폭을 형성한다.
 이러한 이웃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무우'에서 처럼 시대인시긍로 자연스럽게 말화되기도 한다.

 구덩이를 각잡아 팔 필요도 없다 / 경운기에서 쏟아지는 자세대로 썩어 문드러질 녀석들 / 다시 거름이 되거라 '무우'

 무, 배추와 같은 농민들을 땅에 파묻는 농부의 침전된 심정 속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차원으로의 확대라는 단초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사회문제와의 폭넓은 교감확대는 일생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화되고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강렬한 형식이 된다. 이 시대 인식을 각성케 하는 일차적 요인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화되고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강렬한 형식이 된다. 이 시대 인식을 각성케 하는 일차적 요인은 생활속에서 체득되는 분노인 바, 그것은 그가 20대를 보낸 80년대와 전교조라는 변혁기를 거쳐낸 그의 교사 직분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성향을 지닌것이 '한길문학' 신인상 당선시인 '아이들에게', '감자꽃이 피기전에 북을 돋워주세요'등이다.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무심코 먹는 빵이나 교통편으로 이용하는 기차의 철도속에 깃들어 있다.

 실한 감자를 캐며 / 전날 처음 맛본 삼립빵을 생각했지 / ... /빈틈했살로 퍼렇게 독이 오른 감자 / 마루 밑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지 '감자꽃이 피기 전에 북을 돋워주세요'

 잔뜩 분노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감자는 삼립빵과 대조된다. 삼립빵은 미국의 경제원조로 지급된 삼백산업의 원료인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들어진 제국주의 자본 침투의 산물이다. 이는 우리 민중이 땅에서 직접 캐서 간식으로 먹던 감자를 뒷전을 물러나게끔 했는데, 시인은 이 순간을 포착하여 제국주의의 자본침투라는 면을 환기시킨다. 시인은 그것을 '역사의 눈가림'이라고 말하며 '호미를 흙을 끼얹으'라고 외친다.

 자갈과 버팀목에도 방향성은 있다 / ... / 진보란 자갈들의 깨진 이마와 / 버팀목의 뼈마디에 깊은 골로 패여있다. '철로는 목이 마르다 2'
 목마른 철로속에 자갈돌과 버팀목이 있다. 시인은 이런 자갈돌과 버팀목 자체에도 방향성이 있다라고 말하는데, 자갈돌 자체를 시인은 진보(좌익)라고 이름하고 있다. 그런다면 버팀목은 자연스럽게 보수세력(우익)이 돼버린다. 기차가 달리는 데로 철로의 버팀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기존의 인식속에 시인은 버팀목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자갈돌을 보여준다. 기차는 버팀목을 타고 앞으로 잘 굴러갈 수 있지만, 기차가 후진하지 않고 달릴 수 있음은 날마다 깨져가면서 뒤를 꽉 받치고 힘을 모아주는 자갈돌 때문인 것이다. 버팀목은 오랜시간 진득하게 자리를 누르고 있지만, 자갈돌은 수시로 교체된다. 기차가 달릴수 있음은 수많은 자갈들의 희생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정록은 이런 사고 방식을 좌익과 우익으로 편가름되었던 한국 정치적 양상에 대입시킨다. 그나마 우리가 달릴 수 있었음은 수많은 자갈돌(민중)의 희생으로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시각교정은 창끝과 손잡이를 대비시키고 있는 '황새울 1'에서도 드러난다. "죄는 늘 / 피묻은 창 끝이 몫이고" "반대편 손잡이에는 / 부드러운 가죽"을 씌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창끝과 손잡이의 관계는 기존의 시각 역전을 통해 끝없이 그 의미가 연기되는 것이다.
 시집속에서 비중으로 따지자면 몇편되지 않지만, 생활속에서 발화된 시대 각성은 주로 어떤 특정사물을 매개로 하여 기존의 관습적인 인식을 시각교정하고 그것을 정치 사회적인 면으로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런 자세는 같이 90년대에 시집을 펴낸 최영미의 상실성과 김형수의 구비문학적인 넋두리와는 거리를 둔다. 동시에 안도형과 같이 낭만주의의 정점으로 올라서는 것과도 거리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그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자연물이나 인공물, 동물등을 대거 등장시켜 그 속에 감정의 투사나 자아와 동질화를 이뤄내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시각교정과 관계있다. 하지만 자서에서 밝히듯 '분필시'를 시집속에서 한편도 실지 못한 것은 많은 안타까움을 준다. 그는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고 이유를 달고 있지만, 그의 시대인식이 빛나고 중심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교사생활의 증거물인 '분필시'를 어떤 식으로든 살려내었어야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정록의 시 속에 사용된 소재들을 대상으로 그 의미들을 살피는 작업을 하였다. 이 소재 자체만 놓고 볼때, 그것들은 60-70년대로의 퇴보가 아닌가 할 정도로 진부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시단에서 부단하게 캐온 진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록의 시는 아주 새롭게 와닿는다. 진부함을 새로움으로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이런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나는 수직적인 통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이리저리 방만하게 자리를 옮겨다니기보다 한자리에 오래 머무른다. 그의 이런 자세는 시 속에서 수평적인 연대보다는 수직적인 깊이로 드러난ㄴ다. 나무와 동물, 집, 농촌과 같은 전통적인 소재에 천착하여 동화와 투사와 같은 유연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태도라든가, 그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단어 선택과 잊혀져가는 방언의 과감한 사용, 그리고 그것을 시적문맥속에서 녹여낸 태도 역시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잇는 것들의 숨겨진 이면과 지층처럼 축적된 의미를 밝혀내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수직적인 통찰은 다름 아니라 그가가지는 관찰력과 사물에 대한 애정의 산물이다. 이것의 그의 시에서 탁월한 이미지와 풍부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다. 부단한 관찰이 소재들의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상승시키고 숨어서 밝혀지지 않은 의미들을 깨워서 전경으로 내세우게 했다면, 이런 관찰을 가능케 하는것은 그 사물에 대한 애정이다. 낮은 자세로 포복하여 주변의 삶을 오래도록 관찰할 수 있음은 그 사물에 대한 애정없이는 불가능 하다. 이런 주변 삶에 대한 애정의 집약지인 그의 시적 산물은 그의 시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고 때로 우리 인간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사실 이 시대 자체를 고갈의 시대의 양 젊은 창작인들은 소재 자체에 많은 고갈을 느끼며 신음을 하고 있거나, 새롭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주변에 대한 애정과 성찰이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소재 자체 의미는 절대 저홀로 소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재자체를 고갈시키는 근본요인은 현대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거나 또 항상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우리들의 자세에서 오는게 아닐까?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눈과 손길을 바라고 있지만, 제대로 의미평가를 받기 전에 잊혀져 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험이라는 정신은 의미 불능의 것들을 다양하게 늘어놓는 열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험의 대상에 천착하여 일종의 건설로 이어나가는 자세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이미 밝혀진 의미라 할지라도 그 속에 천착을 통한 변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수평적인 확대에서 출발하더라도 반드시 수직적인 통찰에까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창작을 하는 젊은 문학도들은 명심하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대한 애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까지.


 당선소감
 평론

 
 작년에 나온 이정록 시인의 시집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요즘 젊은 창작인과 문학지망생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가지런하게 갖춰져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안정감에 대해서 글을 적어보겠다는 생각으로 펜을 들었는데, 응모기한을 맞추기 위해 마감일 이틀 전에 마무리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잘 적어보려했던 처음 의도와는 달리 논지 전개에 많은 무리가 있는 글이었다. 지금 와서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족한 부분은 계속 고쳐서 보강을 할 것이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자리를 마련해준 충남대신문사에 감사드린다. 좋은 평론을 적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덕목이 요구될 것이다.
 젊은 패기를 갖고 최대한 성실한 비평을 하는 것으로 그것에 도달해 보겠다.

 허정<동아대ㆍ국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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