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6, 김진종)

 "개인적 사고를 벗고 예비 노동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 뒤 이 사회속에서의 역할을 자각하라"
 
 △80년대 초반, 암울했던 시기에 학내운동이 싹트고 가시화되었던 과정은?

 실질적으로 본격적인 시작은 77년부터인걸로 안다. 폭압적 상황속에서 언더라고 불리던 비공개소모임들이 태동하였고 79학번 선배들이 공개성의 문제를 고민한 끝에 80년대 초반, 충대운동이 정립되었다고 할수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83년에는 산발적이지만 본격적인 반전두환투쟁으로 확산된다.

 △언더라고 불리던 소모임들이 주된 활동상황과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한 학번에 4-5명정도씩 모여 주로 학습을 하며 지냈다. 83년부터 양적 질적 증가를 보였으며, 기습시위를 조직하고 통일된 문건을 제작하는등 운동에 있어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총학생회가 건설되던 85년까지의 시대적 배경과 학내과정은 어떠했나?
 83년부터 전두환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공고화되자 학원안정화조치가 내려졌고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과 기관원들이 물러갔다. 이로서 비공개 소모임들이 공개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85년 6월쯤 16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통해 총학생회가 건설되었다.
 
 △80년에서 8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

 82학번 중심으로 전두환파쇼철폐의 요구가 담긴 유인물을 문과대 구름다리 위에서 뿌리고, 도서관에서 스크럼을 짜고 교내시위를 한적이 있는데, 주동자 7명에 제적되었고 우리문화연구회가 해산되었다. 또한 86년3월부터 5월12일까지 수배생활을 하는동안 경제학과 학회에서 4ㆍ19학술제 준비작업을 하다 모두 연행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학생들의 광범위한 분노를 자아내어 이후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한국타이어에 입사해 2년동안 근무하다가 해직되었다. 이유는 타지역 인사발령을 거부했다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학생운동의 경력을 은폐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국타이어 노동조합의 민주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마디 해줄 수 있겠는가?
 못난선배가 되어 후배들에게 뭐라 말할게 없다. 다만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공동체적 사고를 가졌으면 한다. 또한 대학이란곳이 자본주의사회를 지탱유지하기 위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가 생산수단으로 전락한다는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할을 자각했으면 한다.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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