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어뱅크 회장 김정규(경영ㆍ84)동문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앗! 타이어 신발보다 싸다’라는 카피를 기억한다. 그 감각적인 카피의 기업 ‘타이어뱅크’의 모태가 대전이라면 놀랍지 아니한가. 게다가 기업주가 우리학교 동문이다! 타이어뱅크의 창립자인 우리학교 동문 김정규(경영·84) 씨를 타이어뱅크 사옥(중구 오류동)에서 만났다.

 3등칸 유년시절의 선물
 충남 서천군 마산면 신봉리, 가난한 가정에서 5남 중 셋째로 출생했다. 생활력이 부족한 부모님 아래 5남 중 셋째로 살아가기란 ‘가난’이라는 단어도 송구스러운 ‘죽음과 삶’이란 제목의 줄타기였다. 너무 배고프면 몽롱한 상태로 빠져든다는 걸 그때 알았는데 자주 몽롱하고 또렷한 상태를 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버거운 죽음과 삶의 경계다.
 인생의 첫 기억도 결핍의 기억이다. 다섯 살인 김 동문에게 초등학생인 형들이 제안을 한다. “학교 가는 길에 상수리나무가 있는데 형들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상수리를 주워라”. 먹거리가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수리 묵을 쒀 먹을 요량으로 4km 등굣길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상수리를 줍다가 아카시아 가시가 손바닥에 박힌 것. 다섯 살 어린아이의 손바닥에 박힌 가시는 파랗게 멍이 됐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4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충격의 기억이다.
 그러나 기자의 눈에는 김 동문의 결핍된 유년 시절이 불우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실토대로 70년대 초에 김 동문 가정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 서천군 마산면 신봉리가, 나라가 전체적으로 가난했다. 또한 결과적으로 3등칸의 기억은 그에게 1등칸 인생을 선물했다.
 “배곯았지만 오히려 가난이 저를 키운 셈이에요. 배고팠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답이 ‘기업’이었습니다”.

 

       ▲본사와 함께 있는 타이어뱅크 매장 앞에서 서 있는 김정규 동문

 DNA부터 기업인
 김정규 동문은 “부여 홍산중 시절부터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한 인생의 모든 걸 책임져야 했다”고 말한다. 학습지나 우유배달을 하며 용돈과 학비를 해결했고, 국립전북기계공고 진학도 스스로 선택했다. 전액 학비가 감면되는 것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기술전문고에 재학했지만 꾸준히 기업관련 책들로 기업 욕구와 경영 공부의 욕구를 채웠다. 그때 읽은 책들이 7~80페이지 정도의 삼양사나 쌍용사의 경영서다.
84년에는 우리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기업인을 위한 도전이자 단계였다. 대학시절에도 ‘스스로 인생의 모든 것을 책임지기’는 계속됐는데 그때 한 아르바이트 경험이 들어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80년대 중반 전두환 대통령은 사교육 시장을 금지시켰지만 과외교습은 암적으로 여전히 존재했다. 또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김동문 역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이때 그가 남들과 달랐던 것은 ‘모두가 나무를 볼 때 숲을 보는 안목’이었다. 과외시장 전체를 보고 과외 중개업에 도전한 것이다. 사업을 개시하자 수요는 엄청났다. 약 2천 건의 과외를, 한 건당 2만원에 중계했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졌을 때에도 대단한 성공이다.
 그 다음은 운전면허 실기강습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여러 사업으로 마련한 자동차 2~3백대로 대전 시내 여러 학교에서 운전강습을 시작했다. 당시 운전학원의 강습료가 18~20만원정도인데 그는 5만원 정도의 강습료를 받았기 때문에 호응이 뜨거웠다. 나중에는 운전면허학원에서 ‘강습을 그만하라’고 학교 측에 항의를 해서 사업을 접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듣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그럼 공부는 언제 한거야? 사업 때문에 성적관리는 살짝 뒷전이었다고 솔찍, 깜찍 고백 정도여도 괜찮은데 예상을 빗나간다.
 “평소 인간의 DNA가 경제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다른 사람들 보다 그 점이 더 발달된 것 같아요. 사업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죠. 그런데 시험전날 벼락치기로 경영학과 전공서적을 보면 머리에 쏙쏙 들어 왔어요”.
 그는 여러 사업을 병행하면서도 91년도에 3.6의 학점으로 우리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아직 못 다 이룬 도전
 그는 91년 졸업 전에 17일 동안 동남아시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졸업 후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국가경기와 상관없이 성행할 수 있는 아이템을 고민했다. 신발, 타이어, 식품회사, 가전업 따위들이 후보였고 그때 선택한 게 타이어 유통업이다. 90년대 초 우리나라 자동차 문화가 싹을 틔울 무렵이었고 김동문이 가진 자본으로 큰 무리없이 시작 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또한 대학시절 자동차 운전강습을 하며 타이어 교환에 문제를 느껴온 터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들이 안한 것들에만 도전했죠. 블루오션의 개념이죠. 대학 때 과외중계나 운전강습도, 타이어 유통도 마찬가지에요. 운전강습을 하면서 타이어를 교체하면 더러 자동차에 문제가 생겼어요. 당시에 타이어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때 싸고 좋은 타이어를 전문가가 교체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91년도에 타이어뱅크를 창업 했습니다”.
 김정규 동문은 전문지식을 갖춘 직원과 여러 브랜드의 타이어를 유통과정을 줄인 낮은 가격으로 타이어뱅크에 모았다. 그리고 곧 IMF가 터졌고, 소비자들은 싼 가격에 좋은 타이어를 찾아 타이어뱅크에 모였다. 물론 타이어뱅크가 걸어온 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타이어 유통에 독보적인 타이어뱅크에 생산업체의 견제가 있기도 했고, 타이어뱅크의 ‘신발보다 싼 타이어’란 카피를 따라한 아류 회사들이 곤혹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난관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아직 도전할 것이 많다. 타이어뱅크가 세계적 기업이 되는 것이 꿈이다. 최근에는 LA에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빛나는 이유는 기업인의 사회적 역할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저와 타이어뱅크는 우리나라 타이어 가격을 조정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입니다. 그래도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적 기업이 되기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타이어뱅크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예요. 기업의 역할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국고를 창출하는 일입니다. 우리집 가훈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유능한 사람이 되자’인데, 타이어뱅크가 그 주역이 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김동문의 방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듭 ‘별 볼 일 없다’고 했다. 여러 번 부탁해 구경한 CEO의 방은 정말로 별 볼일이 없었다. 그 흔한 트로피나, 장식품, 액자 하나가 없다. 대신에 무언가가 적힌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목표를 써 붙여 반복해서 봐라’, ‘가난은 최고의 죄’, ‘미소로 사람을 대할 것’, ‘도전정신을 가질 것’. 셀 수 없이  생활지침과, 경영관을 써 붙여놓았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그의 도전항목들이다. 스스로 도전에 자신을 밀어 넣고, 그 속에 유배돼 사회를 발전시키겠다는 사람. 그가 우리 동문인 것이 자랑스럽다.

 예소영 기자
 langue-parole@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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