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지 역할 충실, 여론 형성엔 소홀

  '충대신문'이 창간된 지도 벌써 41주년이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불혹이라면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주관대로 산다고 했던가? 지금의 '충대신문'이 그런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지금으로 부터 36년 전,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부를 만한 그때의 '충대신문'인 '충남대학보'를 창간 41주년을 맞이한 지금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1954년 '문리대학보'로 창간된 당시 신문은 59년 6월 29일 '충남대학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오게 된다. 한 때 충북대와 통합하여 '충청대학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기도 했던 '충남대학보'는 1963년 11월 11일자 신문(99호)을 끝으로 명칭을 '충대신문'으로 변경,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면 당시 학내신문이었던 '충남대학보'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학내 주요사건들은 1면에 실려있었다. 그러나 그때 '충남대학보'는 나름대로의 논조가 형성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주로 학내 행사(졸업식, 입학식)와 객관적인 사실 나열이 주를 이루었고, 여론 형성을 위한 기미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자의 주관으로 당시 신문을 평가하면 '충대신문(충남대학보)'은 학교의 행사를 위주로 단순보도하는 기관지와 같은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충남대학보'의 특징을 말할 것 같으면 원론적인 학술분야(논문등)와 충대 학생들의 투고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학술면(정식명칭은 아니지만 성격상 그렇게 부르도록 하자)에서 시사적인 측면도 조금씩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의 투고글로 가득찬 4면은 시와 수필 그리고 지금의 대학신문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연재단편도 실려 있었는데 광고없이 통단으로 짜여진 것으로 보아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면 중에 하나(모두 4면밖에 안되지만)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외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면 '충남대학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99호까지 모두 5번의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그 중 좀 더 객관적으로 조사된 설문 2개가 있었다. 4.19 혁명에 의해 미국으로 쫓겨난 이승만 대통령의 귀국에 대한 여론조사(1963년 9월 28일 제95호)와 학내 학생들의 종교분포에 대한 조사(1963년 10월 21일 제97호)였다.
  교내 학생 373명을 상대로 이씨의 귀국에 대한 조사에서 75.9%가 이씨의 귀국을 찬성했고, 반대는 불과 11.3%, 찬성하지만 국내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자가 12.6%, 그리고 관심없다가 12.6%로 나타났다. 찬성에 대한 의견에서 당시 문리대학보 인터뷰 내용 중 심현보(당시 경상ㆍ3)군은 "세월도 흘렀으니"라며 찬성의견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과 학생들의 의식수준을 바라보았을 때 한 지성인으로써 뚜렷한 의견없이 찬성했다라는 점은 당시 학생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리고 '어느 종교를 믿으십니까?'를 주제로 문리대, 농대, 공대 학우들 1,368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는 무교가 44.5%로 가장 많았고, 기독교가 26%로 많았으며, 불교가 23%로 대부분은 차지했다. 그외에도 유교가 3.5%로 천주교 3% 보다 많아 시대차이를 느끼게 했다.
  지난 시절 '충남대학보'에 대해 잠깐 살펴보았는데 아직 그때는 정치나 시사문제에 대해 다루지 않고 있었다. 기자의 눈으로 당시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 신문이 정권이나 학교당국등 여러가지 조건하에서 대학과 학생의 역할은 학문탐구 부분이고 이것을 중점으로 보도하도록 요구받고 있지 않았냐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시대적 상황과 신문의 역할도 많이 변해왔다. 독자는 지금의 '충대신문'이 '충남대학보'와 같은 역할에 머무르는 것을 절대 원치 않을 것이다.

 

박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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