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6월 29일, 충대신문이 충남대학보라는 제호로 첫발을 내닫은지 벌써 41년이 지났다.
  그동안 인식면에서 학교신문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가 있었고, 형식면에서 신문의 제호와 지면 및 편집의 변화가 있었다.
  최근에는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인식이 바뀌면서 편집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에 41년이 지난 우리신문의 전체적인 면 변화와 고정박스의 변화상을 알아보았다.                -편집자 주-

정리 : 김재중, 박윤자, 조규희, 김혜령, 육미진 기자

 

여론

  우리 신문의 여론면이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89년 주체, 조직, 지면에 걸쳐 일어났던 매체 혁신 운동과 관련이 깊다. 그중 조직혁신은 그동안 봉건적이고 관료주의적이던 대학신문의 형식을 타파하고 독자를 신문의 주체로 내세우고자 발생했다. 이를 계기고 우리 신문에도 비로소 1990년 10월 8일, 지령 669호에 '독자의 소리, 계룡성'이란 란이 마련된다. 그전의 우리 신문 역사에서도 '독자의 소리'라는 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8면 중 한 면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박스형식으로 한 사람의 글을 담아 왔으며 비정기적으로 발간되었다. 후에 '독자의 소리 계룡성'은 94년 10월 17일, 지령 731호부터 '대덕울림'으로 컷이 바뀐다.

 

제호

  제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번 변하였다. 최초의 제호 '忠南大學報'에서 62년 3월에 충남대가 국립충청대로 개편하면서 지령 48호부터 '忠淸大學報'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63년 3월에 교명이 다시 충남대학교로 바뀌면서 제호 또한 '忠南大學報'로 환원되었으며 그해 11월 25일, 지령 100호부터 지금의 '忠大新聞'으로 확정되었다. 86년 1월 13일 지령 591호부터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하면서 서예가 김기승씨에 의해 쓰여져 왔던 '忠大新聞'이란 제호를 가로로 바꿔 사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획광고

  우리 신문의 역사를 들추어 보았을때 기획광고가 차지하는 분량은 아주 적다. 신문발간의 초기부터 일반 알림광고 이외의 기획광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획광고의 등장은 89년 매체혁신과 관련된 광고질서 회복운동에 연유한다. 광고질서 회복운동의 결과 사업광고가 주류를 이루던 대학신문 지면에 '광고도 지면이다'라는 인식이 비로소 싹트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신문에 기획광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8월 17일, 지령 700호이다. 이 때를 시발로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리 신문에도 광고부가 독립되는 모습으로까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편집

  제1호는 4면 발행에 세로 편집으로 1면 전체가 통단으로 16단이 들어갔다.
 그 후, 세로 16단을 유지하면서 제39호부터는 부분적으로 가로 기사도 들어갔는데 제40호부터 전체를 6단으로 가로편집했다. 그리고 제48호부터는 8단으로 구성하다가 지령 90호부터 다시 세로편집을 하였다. 15-16단을 혼용하며 계속 유지하다가 75년 1월 1일, 지령 330호부터는 13단으로 고정했으나 기사의 양에 따라 광고를 줄이고 12단, 14단까지 싣기도 했다. 75년 10월 13일, 지령 354호부터 12단으로 편집했다가 76년 4월 19일, 제369호부터는 13단으로 바꾼다. 77년 3월 28일 지령 395호부터 단수를 12단으로 고정했으나 1면을 제외한 다른 면은 그 특성에 따라 6단-8단으로 단수가 다양해 진다.
  84년 3월 19일, 지령 554호부터는 4면을 완전히 가로편집하기 시작한다. 84년 5월 21일, 지령 560호 부터는 1면에 10단까지도 들어갔다. 그 후, 점진적으로 다른 면까지도 가로편집을 늘여가다가 85년 10월 7일, 제585호에 이르면서 1면을 제외한 나머지면은 모두 8단으로 가로편집을 한다. 86년 1월 13일, 지령 591호부터는 전면을 8단으로 가로편집했으며, 면 특성에 따라 7단 혹은 6단도  들어갔다. 86년 9월 29일, 제597호부터는 주 8면을 발행한다. 그리고 94년 10월 17일, 지령 731호부터는 7단으로 고정했으나 특집호 같은 경우에는 6단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화보

  우리 신문의 41년 역사속에 화보의 변천을 개괄적으로 다루어 본다. 창간기념일이나 개교기념일, 졸업특집호, 신년특집호에 1면을 가득 메워온 화보는 축하나 기념의 의미도 함께 내포하면서 그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①1959년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신문에 선보인 첫 화보이다. 이후 몇년동안 축시와 함께 그림 화보가 들어간다.
  ②우리학교의 모식도를 그려낸 화보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③84년에서 90년까지 드러난 주된 양상으로 단아한(예:글씨) 화보가 등장한다.
  ④80년대 말 진보적 성격을 띈 화보가 눈에 띈다.
  ⑤90년대 이후 보이는 화보의 양상이다. 최근에는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법을 이용하여 화보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사시

  처음에는 사시가 없었고 지령 27호부터 '一週金言', '一句金言'이라 하여 유명인이 남긴 말을 실었다. 지령 305호부터 '今週 의 金言'으로 바뀌었으나 75년 11월 10일, 지령 357호부터 에너지 절약 걷기운동 등에 대한 표어가 실리었다. 그러나 곧 표어가 사라지고 '敎育刷新' (一. 精神草命의 旗手가 되자 一.地域社會의 頭腦 가 되자. 一. 祖國統一의 선봉이 되자)이 들어갔다. 제 370호부터는 '교육쇄신'이 빠지고 학도호국단이나 유네스코 학생회등에서 표어를 받아 실다가 77년 8월 1일 사시(1.학구적인 신문 제작 2.신속 정확한 보도 3.건전한 여론형성)를 제정하고 지령 411호부터 들어가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

 

고난의 역사

  '대학 신문은 대학의 거울이며 대학 양심의 불이 되어야 한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국외자로서 방관하지 않으며 하나의 주체세력으로서 임무를 다해야 한다...'  <1980년 3월 30일 서울지구 대학신문기자연합>
  194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하여 생기기 시작한 대학신문이 학교홍보 및 기관지의 성격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정권과 밀고 당기는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인 80년대의 뜨거운 민주화 열기를 반영하는 글의 일부분이다. 이런 열기가 우리 신문도 예외가 아니어서 최근까지 5차례의 편집자율권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된다. 시기별로 나누어 간단히 내용을 살펴보자.

1.1986년 3월(제593호) ~ 8월(제594호)
    편집자율권 확보를 위해 6개월의 긴 공백기간을 맞이한다. 이 기간 중 편집국장이 바뀌게 된다.

2.1990년 11월(제671호) ~ 12월(제672)호
   
주간교수가 바뀌면서 필자 제한, 기사내용 제한, 학술적 내용을 중심으로 할 것 등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형식적인 합의서로 이 문제는 일단락 된다.

3.1992년 10월(제687호) ~ 12월(제688호)
   
주간교수가 합의서를 부정하고 나서자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또 다른 합의서로 끝맺음하게 된다.

4.1992년 9월(제703호) ~ 1993년 2월(제704호)
   
편집권 확보문제에 광고문제도 포함된다. 합의서로 끝났으나 대학신문 광고의 인식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5.1993년 9월(제715호) ~ 1994년 1월(제716호)
   
광고마찰을 빌미로 일어났지만, 실은 신임 주간교수의 사칙 문제로 제작중지를 맞았다. 3개월만에 합의를 보고 우리 신문은 거듭난다.

 

고정박스

ㆍ보운춘추는 학내외의 일련의 사건을 풍자적으로 논평한다. 마이너스DP(지령 48호)를 시작으로 기상도(지령 81호), 계룡춘추(지령 90호)를 거쳐 보운춘추라는 이름은 69년 지령 200호때 생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ㆍ충대그림마당은 지령 9호때 고정컷없이 시작되어 13호 교내만평, 29호 대학만평, 49호 교내만평, 70호 학원만평, 194호 충대만평을 거쳐 93년 지령 715호때 충대그림마당으로 변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ㆍ교수칼럼인 그루터기는 지령 11호때 소묘란 이름으로 시작되어 124호 교수실, 150호 교수 에세이 릴레이, 200호 교수산책, 501호 백마다상을 거쳐 현재의 이름을 가진 것은 지난해 지령 731호때이다.
ㆍ밀물썰물은 가장 전통있는 고정란으로 9호때 볼펜여담으로 시작해 63년 지령 80호때 밀물썰물로 변경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편집국장이 쓴다.
ㆍ대학풍속도는 부장들이 쓰는 칼럼이다. 383호때 기자석으로 출발하였고, 408호때 현재의 대학풍속도라는 이름을 가졌다.
ㆍ나눔글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창작란으로 181호때 커플 스테이지를 시작으로 648호때부터 현재의 이름을 가졌다.
ㆍ4단 만화인 마군은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다. 2호때 꼰대군을 시작으로 109호 꽁, 131호 유모아, 142호 글쎄군, 229호 보운아, 329호 Mr.보운, 337호 보운아, 552호 마군, 689호 소금이, 706호 솔봉이, 717호 진돌이, 그리고 지난 742호때 부터는 다시 마군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
ㆍ그밖에 사설은 2호부터, 민들레처럼 696호, 영탑지 563호, 시사상식 700호, 호흡의 소리가 611호때 생겨 변화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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