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둣방 아저씨 남정환씨

 인문대와 공대 1호관 사이. 파란 지붕의 컨테이너 박스 안 두 평 남짓한 공간. 일명 ‘구둣방 아저씨’라고 불리는 남정환(대화동·64) 씨는 그 자리를 20년 넘게 지키고 있다. ‘구둣방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다는 기자의 말에 “내가 뭐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특유의 쑥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남씨 아저씨. 뽀얀 먼지 쌓인 바닥에 철퍼덕 앉아 충남대와 함께한 21년 세월을 들어봤다.

 21년, 강산 두 번 변해 도…
 우리 학교에 구둣방이 처음 생긴 것은 25년 전. 현재 있는 곳은 13년 전에 새로 지은 것이고 그 전까지 구둣방은 공대 1호관 중정원에 있었다. “맨 처음 구둣방을 만들게 된 게 학군단원들 때문이에요. 학생들이 구두가 자주 닳고 해지는데 매번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멀리 나가 손질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학교에 구둣방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한 거죠”. 그렇게 해서 20년 전 공대 1호관 중정원에 지금보다 1/4정도 작은 구둣방이 생겼다. 그 때는 남씨 아저씨와 친분이 있던 할아버지께서 일을 했는데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 할 수 없자 아저씨가 구둣방을 맡기로 한 것이다. “내가 구두를 손에 쥔 지도 40년이 됐네. 먹고 살려고 시작한 일을 이렇게나 오래 하게 될 줄이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남씨 아저씨에게 구둣방 일은 생계 수단 그 이상의 것이었다.

 충남대 역사의 산 증인
 “20년 전 학교의 모습이라… 학생 운동이 한창일 때 생각하면 말도 못하지. 학교 안 여기저기서 최루탄도 터지고 애들은 죄다 끌려가고. 학생들은 빨리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느니, 함부로 말하면 잡아가 고문을 당할 수도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고 가고. 그 때는 참 희망이 안 보였는데…”
 당시 우리학교는 전국 최초로 계엄 철폐 가두 행진을 성공시켰고, 87년에는 제1회 전대협 발족식도 거행했다.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는 데 그 누구 못지않게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구두 수선을 위해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아 대화의 맥이 자주 끊겼다.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경인 운하에는 찬성해도 경부 운하는 안 될 것 같아, 그치요?”, “내가 뭐 한 일이 있어야 할 말도 있지. 오늘 잘못 왔죠?”하며 연신 말을 걸어주셨다. 일 하는 데 방해가 될까 조심스러운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더 죄송해진다.

 기억 속의 학생들
 아저씨의 기억 속에는 지울 수 없는 학생이 있다. 
 “전에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인데 여기 공대 학생회장이었어요. 별명이 콧수염이었지. 학생 때도 콧수염을 이렇게 길러가지고 다녔어”라고 말하며 구두약 묻은 손을 코 밑으로 가져가는 아저씨. “내가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곤 했어. 어찌나 나한테 잘해주던지…”
 그러면서 지갑 속에 있던 그 잊지 못할 학생의 명함을 꺼내 보여주셨다. 아저씨 말마따나 찰리 채플린처럼 거뭇한 콧수염을 기른 국회의원 후보. 그는 현재 민주노동당 대전시당에서 일하는 김영덕(40) 위원장이었다.
 그러다가 한 쪽 벽면에 눈이 갔다. 구두를 고치고 계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사진에 문외한인 기자가 보기에도 보통 사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터라 아저씨께 여쭤봤더니, “아, 저거 작년에 어떤 학생이 와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지. 그랬더니 얼마 후에 찾아와서는 그 사진이 상을 탔다는 거야. 금상이라던가… 그 때 와서 액자로 걸어준 거예요”라고 말하며 쑥스러워 하신다.
 좋은 학생들이 더 많지만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학생도 있다.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담뱃불 빌려달라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안 그래요? 담뱃불이 없다고 하면 여기 있는 라이터는 뭐냐고 되물어요. 그러면 그냥 ‘이건 네놈 담배에 불 붙여주려고 갖다 논 거 아니여’하고 말하지. 애들이 점점 버릇이 없어져 가는 게 보기 안 좋지요”.
 
 아저씨의 학생 사랑
 “고친 구두가 내가 봐도 새 것보다 못하지. 그런데 새 것처럼 좋다고 기뻐하는 학생들이 있어”라고 나지막히 말씀하신다. 마침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어떤 여학생이 급히 갈 곳이 있다며 하루만 신을 수 있게 밑창을 때워달라고 찾아왔다. 그 말에 아저씨는 “왜 하루만 신어요. 이 달까지는 안 떨어지게 해줘야지. 그래야 좋지 않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5분 동안 재고 자르고 다듬고 붙여서 완성된 구두. 수리비는 불과 1천500원이었다. 2천원을 내는 여학생에게 잔돈 바구니에서 500원을 꺼내 가라고 하시는 아저씨. 여학생은 튼튼해진 구두를 신고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고 학생의 감사하다는 말에 아저씨의 기분도 좋아보였다.
 기자는 아저씨가 들려주신 일화로 아저씨의 학생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인문대 건물 쪽으로 가는 저 콘크리트 계단 중에 울퉁불퉁한 곳이 있었죠. 세 번째 계단이던가. 학생들이 거기서 맨날 걸려 넘어지는 거야. 아무도 고칠 생각 않길래 구두 굽 깎는 칼로 가서 쪼사놨지. 그랬더니 요즘에는 학생들이 구두 신고도 잘 다니는 것 같더라고요. 나야 좋지, 학생들 안 다치고 그러니까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를 친구삼아 늦은 저녁 식사를 하시는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구둣방을 나왔다. 아저씨 앞을 든든히 지켜주는 원래는 하얀색이었던 재봉틀, 가끔은 시야에서 사라져 아저씨를 애타게 만드는 벌똥뭉치, 놓을 데가 없어서 여름에도 그냥 내버려 둔다는 석유난로, 비에 젖어 구둣방을 찾아온 신발을 말려 주는 고동색 드라이어기, 불교며 대운하에 관해 혼자서 떠들고 있을 작은 라디오까지… 기자의 마음속에 구둣방의 보잘 것 없는 작은 것 하나하나가 가슴에 남았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했던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신다는 아저씨. 그는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글 장애리 수습기자
 sam2408@naver.com
 사진 이기복 기자
 lkb23@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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