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무기화'로 인한 일본정서의 편입

  정치에 있어 대중적 효용성이 으뜸인 것이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음악이 다른 어떤 장르보다 대중적 친화력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선사시대에는 주술적 제의식에 동탁을 달아 음향을 곁들이고 북과 방울을 달아 귀신을 섬겼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지배구조였던 사찰내에 예능공간을 만들어 음악을 통한 포교의 생활화를 꾀했고 조선시대는 어느 역사시대보다도 더 치밀하게 음악을 지배원리의 주요한 한 축으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제례악과 연례악이 예악사상의 미학적ㆍ정치적 논리에 따라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이 시기까지 한반도에서 전개된 음악의 음향적 재료들은 전면적으로 한국적인 것이었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서양음악이 유입되고 여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따라 한국의 전래적 감수성에 심각한 변화가 야기되었다. 즉 일본음악의 한반도 이식과 전쟁음악의 전국적 확산을 목표로 일본국민가요와 전쟁가요의 주입작업이 진행되게 된다. '음악의 무기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일본은 국민개창운동, 음악단체 통폐합, 징병제 음악문화의 신명성과 집단성을 거세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정서적인 황음화(皇音化) 작업과 음악계의 물갈이 작업을 병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본의 정치적 요구에 승복한 이가 서양음악계 인사로는 홍난파, 현제명, 김성태, 이홍렬, 김자경, 박경호, 계정식, 김천애등이고 전통음악계에는 장사훈, 기기루등이 있다. 이들의 친일행각은 일제하 전쟁분위기가 고조된 1940년대에 머물지 않고 해방이후 음악계를 정비하고 일본정서의 제도적 계승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해방이후 이들의 전면적 진출과 역할은 반공이데올로기와 만나면서 활동의 안정성을 보장받게 된다. 일제와 친일음악가에 의해 수행된 한국음악계의 병폐는 크게 세가지로 진행되게 한다. 그것은 전통적 한국음악 사상과 미학의 단결이요, 친일음악가 그룹의 제도적 고착화와 일본정서의 전면적 확산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 사상과 미학의 단절은 서양음악 사상의 힘의 우위를 보증해 주었고 친일파들의 득세는 민족전통음악운동의 거세와 서양음악 중심의 교육체계를 정립케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가 남겨준 뼈아픈 후유증은 해방이후 대중사회에 뽕짝문화의 증후군을 낳은 사실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 문화현상에 대한 어떠한 정책적 대비책을 마련한 바 없다.

 

권병웅<민속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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