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인생을 ‘나그네 길’로 비유한 유행가 노래말이 있다. 일정한 행선지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속성을 빌어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음을 다분히 허무적인 분위기로 노래한 것이다. 배는 출항지와 기항지가 있고, 기차도 출발역과 종착역이 있다. 사람은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 태풍과 파도와 칡흑의 밤과 싸우며 때로는 일엽편주처럼 나약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항공모함처럼 거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처럼 크고 작은 것은 항해의 성패에 있고, 또 목표 지항의 지의 강약에 있지 배의 크기는 그렇게 문제되지 않는다. 출항하는 배에 있어서 이와 같은 항해의 성패와 목표지항의 의지가 중요하듯 인생에 있어서도 목표와 의지는 필수적이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다. 만물의 영장답게 가장 멋있고 가치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각자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대형 고층 건물의 설계도가 있는가 하면 초가삼간의 간단한 설계도도 있다. 율곡 이이는 ‘나는 누구며, 성인(聖人)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면서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음을 호기있게 설파했고, 링컨도 ‘사람은 자기가 품고 있는 포부의 크기만큼 위대해 질 수 있다’며 뜻을 크게 갖도록 권하였다. 톨스토이는 그의 ‘인생론’에서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며, 행복이란 선(善)을 이루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행복의 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설정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명예ㆍ재력ㆍ권력 등을 거론하지 않고, ‘선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한 점은 그의 기독교적인 사랑에 근거한 구체적인 실천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포 김만중은 한국소설사에 큰 획을 긋는 명저 ‘구운몽’을 지었다. ‘구운몽’은 첫째, 육관대사 밑에서 수도하는 불승으로서의 성진의 삶, 둘째, 속세에 태어나 온갖 부귀공명을 누리는 양소유의 삶, 셋째, 그것에 허무를 느껴 다시 성진으로 돌아간 삶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번째 삶은 첫번째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가장 짧은 양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두번째 양소유의 삶은 세속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장면답게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성진은 어린 나이에 입산하여 육관대사의 문하에서 수도하는 맑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문수보살(文殊菩薩)처럼 도를 깨쳐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인생의 목적을 두고 모범적인 수도승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성진의 그러한 삶은 8선녀와의 만남을 계기로 크게 전환을 맞는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뜻있는 일인가를 두고 종래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사나이로 태어나 입신출세하여 뒷날에 이름을 날리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유교적 삶을 따를 것인가 하는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결국 성진은 유배의 형식을 빌어 속세의 삶을 택한다. 양소유로 태어난 성진은 외적을 토벌하여 승상의 지위에 오르고 또 부마가 되는 영광을 누릴 뿐 아니라 8선녀의 후신인 8명의 여인들을 차례로 아내로 삼아 영화롭게 산다.
  만년에는 인생무상을 느끼던 양소유가 호승의 설법을 듣고 크게 깨달아 8선녀와 함께 불문에 귀의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성진→양소유→성진’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이어지는 일련의 서사구조에는 전환의 마디마다 삶의 목표가 각각 달리 설정되어 있다. 성진이 불승으로서 인류를 제도하는 일, 양소유로서 가정을 갖고 입신 출세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일, 양소유가 세속적 명예와 인생이 무상함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하여 성진으로 복귀하는 일의 세가지 단계로 나타난다.
  성진이는 성진이로서의 삶의 목적이 있고, 양소유는 양소유로서의 삶의 목적이 있다. 어떠한 것이 더 가치있고 행복한 삶인가를 쉽게 단정해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따라 얼마든지 견해가 다를 수가 있다. 일반인이나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성진의 환속은 발전적인 전환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한편 수도자의 측면에서 보면 타락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자로서의 성진과, 선비로서의 양소유의 삶의 포부와 목표는 모두 가치있고 아름다워 보인다. 소승적 자세를 버리고 민중을 제도하는데 뜻을 둔 성진의 자세는 나라에 위난이 닥쳤을 때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는 양소유의 헌신적 태도와 조금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저자인 김만중이 ‘구운몽’에서 추구한 인물은 성진인가, 양소유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계기적 구도로 보면 결국 성진이 인 것 같다. 성진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운몽’이 환몽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소설이 성진의 복귀로 영영 닫힌 상태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양소유로 윤회, 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구운몽’은 인간의 수도(양)적 속성과 출세적 속성을 둘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운몽’에서는 두가지의 삶의 자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추켜세운다거나, 파기하고 있지 않다. 삶은 속성자체가 포괄적이며 원통자재하다. ‘구운몽’은 우리에게 획일적이며 고착적인 사상이나 삶의 자세를 갖지 말 것을 시사해 준다. 수도(양)적 삶을 살것이냐 출세적 삶을 지향할 것이냐를 하나만 고르도록 강요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은 각자 선택하되 성진처럼 혹은 양소유처럼 자기의 포부를 뚜렷이 간직하고 성실히 실천해 나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되 정처없는 발길이 아니라 뜨거운 인류애를 품고 성실히 걸어갈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구운몽’이라고 생각한다.

 김영관(물리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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