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수필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 우리 충남대학교에서만 보아도 교수님들  상당수가 별세하셨다. 이제 나도 미구에 귀천할 날이 오리라 보아 그 날을 준비하고 있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나는 젊어서 미리 죽음에 대비해 이렇게 써 놓았었다.
 
‘나는 죽음을 위해 평생을 살았네//죽음을 생각하면/정말 빈손으로는 갈 수 없어//죽음이 다가올수록/나는 죽음을 
위해 나날을 살았네’(김봉주시집 「하늘에 쓴 연서」, 61)
영문학과 김봉주 명예교수

 인생의 출발은 문학이었으나, 인공(人工) 국제어를 만들어 볼 생각에서 조교수 때에 영어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로 인하여 나의 학문의 목표는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언어를 만들 수 있을까’와 ‘심오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심령문제를 해명하는 데’에 두어졌다. 학생 동아리로 충남대 심령과학회(1975)와 충남대 국제어연구회(1979, 에스페란토 학회로 개칭)를 창설한 의도는 여기에 있었다.
 이제 희수를 맞이하여 평생의 연구물과 생활기록물들을 총정리하고 있다. 이들이 완간되면 내가 하늘의 소명에 부응한 일을 어지간히 마친 것으로 생각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한 가지 특기할 게 있다. 나는 충남대 회지 「보운」 제14호의 ‘내 고향은 캠퍼스’라는 글에서, “현대문명의 물결이 밀려와 내 고향이 대덕연구단지로 수용되면서 내가 살던 가옥이 충남대 부지가 되어 폐허가 되었다. 대대의 선산에 농과대학이 들어섰다. 뜻과 꿈에 반하여 집을 내 놓고 집안이 흩어지고 가족이 내 몰리어, 한이 되신 어머님은 1년여 만에 작고하셨다”고 썼다.
 그로 인하여 나는 우연히(?)도 내 고향인 캠퍼스에서 태어나고 자라, 수학(영문과 제1회)하고, 조교를 거쳐 교수로서 연구하며 가르치다가 40년의 모교 교수 생활을 정년으로 마치는(1997)는 참으로 특이한 연고자가 되었다. 한이 맺힌 것은 고가가 없어졌으며, 마당 한 가운데 사랑하던 약수 샘물이 묻혀버렸고, 내 육신을 묻을 뒷산을 모교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 후 나는 고향을 찾아도 그리운 고향이 아님에 시간이 나면 옛날을 그리며 학교 뒷산에 올라 시름을 달래곤 한다. 지금도 나는 정말 ‘집과 샘만이라도 되찾아 나의 꿈을 이루었으면’하고 갈망한다.
 그 산정(山頂)이 실은 내가 지난해 8월 출판한 수당대표시선 「하늘에 쓴 연서」에 나오는 “오늘도 산마루에 홀로 앉아서...”라는 바로 그 산마루이다. 이 시집이 나오니 평론가 홍윤기 박사는 “엘리옷적인 로맨티시즘의 신고전적 해석, 서정미 넘치는 순수 서정과 애포리즘의 미학, 크리스티나 로젯티와 같은 순수하고 해맑은 서정미”라고 극찬하였다. 이 시집은 시사문단 신인상에 이어 한국현대시문학연구회 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에 몇몇 신문에 “50년만의 시, 상복 터졌네”(조선일보), “50년 잠자던 시, 날개 펴다”(동아일보), “75세 교수 문학상, 시인상 받다”(충청투데이) 등 보도됨으로써, 노래(老來)에 참으로 과분한 영광을 누리었다.
 이런 특혜를 내려주신 하나님께 요새 매일 감사드리며, 여생을 더욱 철저히 죽음에 대비하고 있다.
 미리 써서 제자들에게 주어 놓은 나의 비문은 이렇다.

 ‘충남대학 터에서/태어나 자라서//
 충남대학에서/수학하고//
 충남대학을 위하여/
 연구하고 교수하다가/일생을 마치었으니//
 충남대학을/죽어서도 길이 지키는
 /신(神)이 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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