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등정한 산악회 대장 최장헌(경영․4)군을 만나

  알프스를 떠올리면 하얗게 눈이 덮인 산자락의 그림같은 즐비한 집, 그 안에 할아버지와 살던 귀여운 꼬마 ‘하이디’가 생각난다. 산악인들이 꿈꾸는 하얀 산, 알프스를 다녀왔다는 우리학교 산악인이 있어서 그를 만나러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지난해 여름, 7월 9일부터 8월 11일까지 20일간 15명의 대원들과 함께 우리학교 개교 50주년을 맞이하여 알프스를 다녀왔다. 좀더 나은 실력과 기술향상을 위해 순수 알피니즘(생활 속의 등반)의 본 고장인 알프스를 찾았단다. 도착해서 알프스를 보고 세포 하나하나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는 그는 등반할 때가 가장 재미있다고 했다. ‘산사나이’로 알려져 있는 그에게 산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시험기간이 아니면 주말마다 근처 계룡산, 대둔산의 암벽을 등반합니다. 등반하면 잡생각이 들지 않아 좋아요. 하지만 능선을 걸어갈 때는 가족, 장래 등에 대한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라고 수줍게 웃었다. 졸업하면 대학원에 가서 암벽등반 전문의 경기 지도자 공부를 했으면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 산 등반은 하루만에 다녀오는 반면 에베레스트 산은 한 달, 알프스 몽블랑은 3∼4일정도 걸린단다. 일정을 물어보니 등반 때의 모습이 설명과 함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사진에서 머리보다 높이 쌓인 짐을 등에 메고있는 패기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장비는 보통 20㎏이지만, 자고 오는 경우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짐이 무거워지면 기술력,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등반을 위해 짐을 최소한으로 합니다. 그래서 몇 일간 약간의 간식과 물로 버티고 잘 때는 파카만 입고 잡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자연과 하나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을 묻자 고추장에 따뜻한 밥을 비벼먹고 싶었다면서 뜨거운 국물음식도 그리웠다고 했다. 그 지역 물은 눈이 녹은 것을 정제했기 때문에 물보다 맥주, 포도주가 더 싸다고 귀띔해주었다.
  출발 전에 알프스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못해 현지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며 다녔다고, 중학교 수준의 영어실력이면 의사소통하는 데에 불편하지 않았다고 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프랑스 샤몬 마을 일대를 돌아다녔는데, 집집마다 꽃과 나무가 있어서 경치가 참 좋았단다. 고지에 따라 기온이 달라 눈이 있어도 더웠다면서 반팔옷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여주었다.
  대장으로서 어려웠던 적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빙벽 등반 도중 피켈(고정할 수 있는 도구)을 잘못 꽂아 다리를 다친 96학번 형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행히도 조난기술과 의료체계가 좋아 호출 5분만에 헬리콥터가 와서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그 형이 지금 휴학을 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요. 그 형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마음에 걸려요. 그래도 다치긴 했지만 모두 무사히 살아 돌아온 대원들이 자랑스럽네요. 형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등반하기 전에 대원들에게 조난을 당해도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을 각서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사방이 눈이라서 거리감이 사라져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고 온통 하얀 산속에 묻혀있는 사진도 보여주었다.
  사진첩을 보다가 산 정상에 성모마리아상이 있어 어떤 사진인가 했더니 전문 산악인도 힘들어 등반이 5년간 뜸했던 ‘도류(가장 힘든 북벽)’를 이번에 우리대학 산악인이 등반한 기념사진이라며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정상에 서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요. 올라올 때 체력의 90% 이상을 소모해 버려서 정상에 오래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허무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요. 내려올 때는 정신력으로 버티지요.”
  올 여름 공주대 산악회가 알프스에 간다고 해서 자료(계획서 및 보고서)를 전해줄 것이라며 가장 가고 싶은 산을 꼽아보라고 이야기 했을 때 ‘에베레스트산’이라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입산료가 1억인 그곳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두려움이 없는 푸근한 안식처, 국내산에 반해 국외산은 죽음을 각오하고 올라가기도 한다고 했다. 산은 위험하지만 올라갔을 때 내가 살아있다는 본연의 삶을 느끼는 그는 진정한 ‘산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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