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충남대학교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된 전완섭 선생을 만났다. 사진 속 그는 온갖 악기와 수십 명의 연주자들 앞에 서있다.

 꼬마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음악 하는 사람을 ‘딴따라’라고 부르며 괄시하던 그의 어린 시절, 그는 네 살부터 아코디언을 손에 잡았다. 처음 악기를 잡은 꼬마 전완섭에게는 가장 작은 크기의 아코디언조차도 버거웠다. 자기보다 큰 악기를 몸에 한번 묶어 매고 미군부대에서 공연을 했던 그의 어린시절이 무척이나 특별하다. 그는 “그냥 부모님이 좋아하셨기 때문”이라며 웃어넘긴다.
 중학교 때는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불었고 1983년 고등학생 시절 대전시립 교향악단 창단멤버로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 선생은 코리아윈드 앙상블에서도 창단멤버로 시작해 현재 지휘자를 맡고 있다. 또 그는 우리학교 관현악단의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친근한 지휘자
 나이로 따지면 관현악단 5기인 그는 지휘자보다도 친근한 선배님으로 대접을 받는다. 연습 중에 화내는 법이 없는 그는 딱딱하고 무서운 지휘자가 아니다. 관현악단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칭찬이 쏟아진다.
 “지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과 학생들이 함께 연습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그는 “특히 졸업한 동문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어 우리학교 관현악단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로 단가를 부르는 장면을 꼽는다. “연주회를 마치고 관현악단 단가를 부르는데 그 때 동문들이 객석에서 일어나 다 같이 노래를…….”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복한 연습시간
 “최근에 가장 기뻤던 일은 뭔가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는 또 관현악단을 들고 나온다. “웃긴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관현악단과 함께 한 연주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연주회 첫 곡이 ‘운명’이었는데 학생들이 몇 달 동안 연습하고 나에게 와서는 전 악장을 하자고 하더라.” 그는 그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내가 처음에 한 악장만 하자고 했더니 우는 아이도 있었다”며 나중에 “전 악장을 해보자”고 하자 다들 좋아서 난리도 아니었단다. 그에게 학생들과 함께하는 음악 시간은 너무나 행복하다.
 그는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음악을 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소리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단원들과 연주할 땐 따듯한 소리가 난다. 마음을 담아내는 그런 소리들.” 그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연주가 눈앞에 그려진다.
 기쁜 시간이 있으면 아쉬운 시간도 있는 법이다.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관현악단이 연습하는 모습은 후자다. 그는 “벌써 33년 정도 되었는데 동아리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지원이 제대로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충남대학교 관현악단의 이름으로 움직이는데 연습실이 없어서 강의실에서 연습을 하다가 쫓겨나오기 일쑤”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원이자 후배들이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음악에 몰입하는 모습에 그는 감격한다.

 “음악, 너는 내 운명”
 인생일로를 음악 한가지로 채운 그는 그렇게 말한다. 악기 하나만 있었다면 지칠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가지 분야로 음악 자체를 하다 보니 그럴 겨를이 없다. 하나를 끝내면 할 일이 하나 또 생기니 늘 감사하단다.
 그는 자식처럼 여기는 학생들에게 “잠까지 줄이면서 죽을 힘을 다해보라”고 말한다. 꿈을 가지라고 말한다. 또 “나의 목표는 오보이스트가 아니라 음악가가 되는 것”이라며 “어려운 환경가운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밖에 길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야기가 나온 참에 관현악단을 찾았다. 1학생회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들려오는 악기소리가 커질수록 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는 지휘자이자 선배를 알아본 학생들의 인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사무엘 기자 sisicolcol@cnu.ac.kr
사진 / 진희정기자 swhj@cnu.ac.kr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