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삶에 대한 진지한 애정


  소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에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사람다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일정정도 이상의 경제적 능력? 도덕적 완성? 이 책이 제시하는 사람다움의 기준은 단선적인 이념이나 실천과정의 정당성과 같은 외적인 기준이 아니다. 즉 작가 임영태의 기준은 어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규준적인 상이 아니다. 또한 알수 없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도 아니다.
  특별한 교육도 받지 않고 직업도 없는 백수인 ‘우리’와 두호는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이다. ‘우리’는 정말 하루벌어 이틀을 놀고 이틀을 놀기 위해 또 하루를 일하는 정말 쓰잘 것 없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끔 강릉에 사는 친구 두호를 찾아가는 것을 생활할의 활력소로 생각한다. 두호도 그들과 별로 다를 바 없지만 ─ 사실 작가는 이 조그만 차이로 사람다움을 말한다. ─ 작은 공사장에서 십장을 쫓아 다니며 일을 한다. 그리고 그는 가끔 오는 그들을 위해 자신이 번 돈으로 하룻밤의 배부른 식사와 향락을 제공한다.
  두호는 그러나 삶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 미묘한 관계의 친구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누이와 동생. 그는 지켜나가야 할 것을 가지고 있다. 작품에서는 이런 두호의 행동에서 타인의 삶에 개입하여 더 좋아지게 하려는 의지가 부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화자의 교차적인 변동에 의해 ‘우리’들의 의미없는 일상의 유희들과 대비된다. 작품에서 우리는 비슷한 사정에 있는 룸펜프롤레타리아의 두 유형을 발견한다. 그리고 유형을 구분하는 작은 차이속에서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호의 인간다움은 작품의 종결에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인간적이지 않은 ‘우리’들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래, 결국 살아 남는 것 사라져 가는 것 속에서 진정한 가치는 묻혀 버리는 것일까? 그러나, 작가는 또 한번의 선명한 대비를 준비한다. 실로 우연하게 ‘우리’는 신문을 읽게 되고 거기에 실린 신입기자의 소감을 읽게된다. 사회 초년생 기자가 가지는 삶에 대한 진지함과 희망은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우리’는 끈질기게 살아남지만 일상은 지옥이다. 일상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일상은 ‘우리’에게 위안도 아니고 ‘우리’는 일상밖의 더 나은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다른 세계가 실천으로 도달할 전망이 아니라면 단지 바람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편이고 그저 은근히 숨기고 있는 자기 안일함의 뿌리깊은 근원이다.
  행복해지는 것이 문제라면 우리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은 현재에 대한 만족 즉 현론체계에 대한 굴복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현실직시’를 통한 삶 자체의 변혁이며 일상의 해체로서의 일상이다.
  삶을 벗어나 있는 또 다른 세계란 ‘희망’일 수는 없다. 일상의 해체는 삶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가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기에 누구에게나 삶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며, 역사로 바라보아야 하는 필요를 충족함으로서만 가능하다. 삶의 역사를 예술의 창조과정과 같은 진지함으로 다가갈 수 있을때,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범주가 삶을 판단하는 기억하는 범주로서 원용될 수 있을때, 물질과 사회 발전과정의 틀로서의 역사유물론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예술가나 혁명가와 같은 생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소외된 삶의 한 구석에도 사람다움과 사람답지 않음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고 그때 사람다움은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이다. 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인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인 능력때문은 아니다. 물론 재능없이 글을 쓸 수는 없을 테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욕망이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삶에 대한 애정과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럴때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한 폭력 없이도 일상에서 일상을 뛰어넘는 행복의 아이러니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작은 한편의 소설에서도 ‘희망’은 있다.

오민우(제약ㆍ3, 금강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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