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주검 두 구가 더 이상 충대에 있기가 머쓱하다. 주검들을 기념하는 동산에 술취한 후배의 구토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배의 혼을 위로하느라 최소한 꽃다발이라도 쥐어져 있었으면 모양새가 좀 낫겠는데. 선배의 몸위로 만취한 채 고래고래 최근 유행가를 불러주며 토사물들을 쏟아붓는 이가 너무 많다.
  오원진, 윤재영군 열사들을 기억하는가. 윤재영 열사는 65년 8월 13일에 태어나 87년에 우리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계속되는 수배생활 중 음습한 반지하방 전기 장판에 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고통에 겨워 가래가 섞인 휴지 뭉텅이를 쌓아가며 신음했다는 그. 천식을 앓다가 마지막 날에는 주머니에서 기도를 뚫는 기구까지 꺼낼 정도로 고통에 신음했다는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마찬가지, 오원진 열사도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었던 역사적 변혁기 80년에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늘 가두 투쟁의 선봉에 나서서 싸웠지만 수배와 구속에 뒤쫓기는 삶이었다. 그는 민중 교회 야학, 가톨릭 노동 청년회, 가톨릭 농민회, 가톨릭청년회, 기독 청년회 등을 이끌었던 선배였다. 특히 86년에는 게다가 학원 안정법을 철폐하라고 맨몸으로 외쳐대기도 했다고 한다. 86년도 전투 경찰이 여전히 학내에 몇 개 중대씩 상주하던 시대다.
  1992년 9월 10일, 92년 10월 10일 각각 운명한 그들을 기리는 상징은 그들을 기리는 삶의 조형으로는 너무 단촐하다. 94년에 노천극장 맞은 편 언덕에 세운 추모 조형물이 밋밋하게 서서 그들의 삶을 몇 안되는 글씨로 나열하고 있다. 조형물이 문제가 아니라 토사물을 쏟아붓는 등 그들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혹자들은 요즘 대학가를 지칭하여 신선한 아이들이 많아져서 좋다고 표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학원은 취업 중간단계로 전락하고 대학생다운 학생들이 없어졌다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어떤 형태가 되었건간에 우리는 시대의 조류와 지역 문제를 가슴에 받아야할 현시기 대학인이다.
  배움에 지쳐 가끔 술을 어깨 동무 걸쳐 먹는 것도 좋다. 어쩌든 대학인은 고민과 사색이 풍부해야하고 그만큼 순수하게 떠안는 가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눈을 감은 지 이제 4년이 지났다. 또 그들의 눈을 감긴 9월, 10월도 지났다. 자, 수배 생활에 쫓기면서 민주화를 고민했던 선배들을 생각하며 이 쓸쓸한 11월에 그들의 조형물을 한 번 경건하게 돌아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김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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