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

 당신과 나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우연히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아파트에서 당신과 내가 마주쳤다.
 나는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 아래에서 절규하며 눈물을 흘릴만큼 세상에 넌더리가 나있다. 그런 나를 보고 당신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 빈 아파트에서 당신과 내가 할일은 무엇인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폴과 잔느는 격렬한 섹스를 한다. 당신과 나도 그렇게 될까. 가능성은 있다. 삶의 갈등, 번민에 대해 넌더리가 나있을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디서 흘러온지도 모르는 남자와 또는 여자와 끝없는 밀회에 빠지는 흔해빠진 망상을 갖고 있지 않은지. 그럼 당신과 나 사이에도 격렬한 섹스가 일어날 충분한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1972년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대담한 성표현과 자위행위, 저속한 말투로 인해 15년간 이탈리아에서 상영금지 됐고, 주연배우 말론 브랜도는 법의 재판을 받았던 영화.
 우리나라에서도 네번이나 수입불허가 됐던 매우 화려한(?) 전적을 갖고 있는 대단한(?) 영화이다. 언제나, 금기시하는 것은 그것의 정비례로 혹은 두배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이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과 기대감으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막이 올랐다. 빈 아파트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가족도, 계급도 거부한 순수한 이상을 생각하는 폴. 머리는 폴의 이상향에 동조하지만 가슴은 보수적 부르주아인 전형적인 여자 잔느, 이 둘은 아파트에서 격렬한, 변태적인 성행위를 통해 자유에 대한 해방감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들 관계에서도 계급과 신분과 사회의 제도, 권력은 끊임없이 파고든다.
 계급과 신분도 모른채 맺어지는 이 희한한 관계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관객이 긴장감을 놓아버릴 순간에 음악은 배우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영화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이렇게 해서 다시 영화속으로 들어갔을때, 정상적인 관계를 원했던 잔느가 폴을 총으로 쏨으로서 영화는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빈 아파트에서 순수한 이상을 생각했던 폴이 패배한 것이며 너무나 낭만적이었을 뿐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마지막 황제’나 ‘리틀부다’에서의 감독은 이 영화에서 없다.
 스케일이 전혀 큰 것도 아니며 감독 특유의 과거에 대한 집착보다 현재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만족할 만한 점은 폴의 연기를 말은 말론 브랜도이다.
 그가 정말 폴인지 아니면 말론 브랜도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완벽한 연기를 했다.
 과거회상의 장면에서 진짜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를 얘기한 말론 브랜도는 자기의 내면을 정확히 짚어내고 보여줬다. 아마도 이 영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말론 브랜도를 또다른 자아인 폴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사실, 170년대의 영화를 1990년대의 말에 본다는 것은 기대와 달리 시시한 일이었다. 이 영화가 왜그리 70년대에 화제가 되었는지 매니아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영화의 주제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70년대의 많은 사람들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것 같다. 오히려 이러한 과대평가와 오해가 이 영화를 더욱 유명한 고전으로 만든것을 아닐까.
 90년대의 사람들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잔느의 나체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계속 나타나는 것은 도대체 관객의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영화는 그것으로 인해 싸구려 냄새가 나는 에로틱 영화가 될 위험에 빠져있다. 역효과만 난 것이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가지고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넘어 이제는 법과 예술의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아니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는 이 웃기는 나라에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또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이 미 선
(사회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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