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역린

  바람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 날에 팔 사이에 노트북을 끼우고 집 앞 공원에 나왔다. 해는 멀리 보이는 산 너머로 사라졌고 주황색 빛들만이 태양이 이곳을 비췄음을 알게 해줬다. 옅어지는 주황색 하늘 위로 노란색 하늘이 그 위로는 초록색 하늘이 그 위로는 파란색 하늘이.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 그 맑은 빛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소중한 것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해는 저물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 대화소리가 들렸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끊어져 버릴 듯이 힘든 순간, 내가 놓아 버리면 사라질 듯한, 일방적으로 내가 위태로운 순간. 지금까지 해 오던 모든 것들에 의심이 생겨나고 자신감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고 결국 홀로 남게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망설임 없이 미소 지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감정마저 사치라고 느껴진다. 과도해진 책임감과 따라오는 부담감 사이로 억눌린 내가 보인다. 절대적 가치들이 넘어지고 영원할 거라 믿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믿음이 무너진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생각보다 내가 별로라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특별해지던 어느 날, 처음으로 공허함을 느꼈던 날, 그날들에 사로잡혀 있는 지도 모른다. 시간 속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풀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감정을 이겨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억눌렀고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됐다. 감정에 무덤덤해질수록 나는 풀려난다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웃을 수 있었다. 기억의 오랜 구석에서 빛바랜 파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잔인하다. 생각이 나기 때문에 단지 떠오르기만 해도 언제 어디든 기억 속의 장소로 회귀할 수 있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억들은 더 자주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사람들은 이 감정들을 흔히 슬럼프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펼쳐 봐도,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려고 해도, 친구들과 신나게 놀려고 해도, 마음 한가운데 남아있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점은 이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1년에 한두 번 기분이 끝도 없이 추락할 때마다 이제 나는 그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단지 밖의 가로등 불빛에 눈이 가려져 내가 하늘에 걸어둔 별빛을 잠시 찾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고요함과 같이 가로등에 떨어져 어둠에 잠긴 의자에 가만히 앉아 보면 알 수 있었다. 공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서쪽하늘에 낮게 걸쳐 있는 저 별의 존재를 알아챈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아이가 잠시 하늘을 보지 못했다며 아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공원의 하늘은 공평하다.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사람에게도, 강아지에게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달라지는 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뿐이었다.

권사랑 (정보통계학·2)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