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분뇨처리

  오늘날 우리가 화장실 변기에 배설한 분뇨는 하수처리 과정을 거쳐 깨끗한 물로 정화된 후 생활 속에서 재사용된다. 그렇다면 하수처리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던 조선 시대의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어떻게 분뇨를 처리했을까? 
  조선 시대 사람의 분뇨는 퇴비 재료로 매우 소중히 여겨졌다. 조선 시대 법률에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삼십 대에 처하고,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 오십 대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농촌에서는 분뇨가 중요한 거름이었지만 한양 도성만은 예외였다. 한양 도성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농경이 금지돼 있어 분뇨를 퇴비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성 내에서 농사를 못 지으니 당연히 분뇨 운반 수단이 있을 리 없었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부득이하게 도성으로부터 분뇨를 날라야 했다.
  그러나 분뇨는 비포장길을 따라 수레로 운반해야 했고 운반 과정에서 강을 건너야 했기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길거리에 오물을 흘리는 자는 곤장 40대에 처한다'는 법률 조항까지 뒀으니 실로 가혹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야간 운반이 불가했기 때문에 도성 내의 분뇨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도성 내의 분뇨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법적·제도적 장치의 부재는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의 ‘북학의’에는 한양 곳곳이 인분으로 뒤덮여 지저분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양 도성에 인분이 이토록 넘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무엇일까?
  당시에는 폭증한 인구를 감당할 만한 하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조선 시대 전기인 15세기 초 10만여 명이던 한양의 인구는 18세기 들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실제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도성 안에 인민이 너무 많다고 한탄한다. 이에 비해 한양의 분뇨처리시설은 마땅치 않았다. 분뇨를 전문적으로 수거해 생계를 유지하는 업자가 있었지만, 때로는 그들이 도로와 하천에 분뇨를 버려 도성은 악취와 벌레 그리고 수인성 전염병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겪었다. 또, 장마철에는 하천이 범람하면서 분뇨가 섞인 오수가 거리로 번졌을 것이다. 결국, 한양의 분뇨처리 시스템은 인구 급증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후 영조는 1760년(영조 36년)에 오염된 하천의 물이 잘 흐르도록 그 바닥을 깊게 파내는 대규모 준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준설 작업은 한양의 분뇨 오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한편,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인분으로 덮인 한양 거리가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경복궁 담장,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아래, 시청사 부근, 종묘 광장 등 서울 주요 지점의 조선 시대 지층에서 감염 비율이 높은 회충·편충 등의 기생충 알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위 연구 결과는 한양에 인분이 널려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줬다.
  조선 시대 오물처리 정책의 실패는 사대부 집권층의 이중적인 분뇨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토지의 비옥화를 통한 안정된 농산물 수확을 위해 바깥으로는 분뇨의 생태적 활용을 널리 권장했지만, 안으로는 사람의 기본 욕구에 대한 절제와 금욕을 최고선으로 여겼던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분뇨와 측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이중성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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