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심취>의 첫 글은 사람들이 상대를 알기 위해 취미를 물어본다는 주제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취미와 취향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혹은 우리가 스스로의 취향을 알게 된다면, 나 자신을 얼마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내 취향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취향은 선천적인 것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 취향에는 주위 사람들이나 매체에서 보고 들은 것이 묻어 있다. 일상적으로 보는 드라마, 영화, 책, 만화 등이 잔상으로 남아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다. 만화영화 <들장미 소녀 캔디>의 주인공 캔디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참는다고 한다. 그 슬픔을 티 내지 않고 가루가 될 정도로 참는다.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소진하면서까지 일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일까? 어쩌면 취향은 한낱 망상이나 환상에 지난 것은 아닐까?
  김이나 작사가는 BBC 뉴스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 취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취향’이라는 것은 단순히 취미와 여가라는 개념을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알려주는 방향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취향은 요즘 같은 시대에 적극적으로 찾고 지키지 않으면 진열된 사람들이나 진열해 놓은 것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만들어지기 쉽다. 요즘은 온통 알고리즘 투성이인 무서운 세상이라 내 성향, 취향에 맞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다 허구 같은 평균치에 맞춰 살아가려고 하는 게 오히려 집단주의 아닌가? 그녀의 말대로 세상은 알고리즘 투성이고 좋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큐레이션 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잘 팔리는 책일수록 잘 팔린다. 그런 책 한두 권이 출판사가 얻는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취향인 사람들은 음원 차트 100위 안에 드는 노래만 듣는다. 그에 따라 음악 시장은 100위 안에 드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둔다. 반면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은 특정한 집단과 논리에 매몰돼, 자신과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은 시야에서 제외한다. 세상은 연결됐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단절됐을지도 모른다. 방금 든 예시처럼 상식과 비상식에 대한 의견들이 넘쳐나는 걸 보면 말이다.
  다수의 선택이 안전하니까 똑같이 선택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선택한 집단의 취향만 믿고 그 외의 것은 무시하는 사람들. 이 두 부류는 다수의 의견에 의존하고 휘둘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제는 대중의 의견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이야기와 보편적인 이야기는 다르다. 일반적인 것은 상식이고, 보편적인 것은 예외가 없거나 찾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망상, 환상을 이룰 수 있는 공상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취향을 일상에서 이어나가기 위해 개인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혹자는 일하기도 바쁜데 취미만큼은 편하게 누리면 안 되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취미는 선택이고 취향은 본인이 직접 세워야 한다. 취미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으나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취향이 자신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타인의 의견은 털어버리고 나만의 취향을 찾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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