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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예술의 영역을 넘어선 역사의 보배
김재중 기자 | 승인 2020.06.03 15:41|(1169호)
조선 태조 어진 곤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한 태조의 정면상  사진/ 어진박물관 제공

  조선 시대, 임금과 관련된 단어는 평소에 사용되는 것들과 특별히 구분됐다. 예컨대 왕의 얼굴은 용안, 의복은 용포로 불렸다. 임금이 그려진 초상화 역시 따로 명칭을 뒀는데, 바로 어진(御眞)이다. 어진은 조선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그린 작품인 만큼 눈썹 한 올도 허투루 그려지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지금 봐도 수준 높은 화격을 자랑한다. 
  아쉽게도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어진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이번 기사에서는 어진의 역사와 제작 과정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어진들이 왜 이토록 적은지 그 원인도 같이 다뤘다.

조선 세조 어진 현존하는 유일한 초본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임금의 초상화, 어진 
  어진은 크게 임금이 생존해 있을 때의 모습을 그린 ‘도사’, 왕이 붕어하고 기억에 의존해 그린 ‘추사’, 이미 완성된 어진이 훼손됐을 경우 다시 그리는 ‘모사’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재밌는 점은 임금들의 구도 변화다. 조선 초기의 어진들은 정면상이었다가 중기에 들어서 묘사가 쉽다는 이유로 측면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서양식 화법의 도입으로 정면을 그리기 쉬워져 다시 정면상으로 돌아왔다. 
  고려 왕조도 어진을 그렸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증거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진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어진은 1677년 제작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어진의 모사본이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동아일보』 와의 인터뷰에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원본을 모사한 것이라 제작될 당시의 용안과 다를 게 없다”면서 “우리나라 초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품”이라는 평을 내렸다. 정 교수의 말을 토대로 어진을 그리는 문화는 최소 고려 때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근거로 고려의 색채를 지우는데 한창이던 1426년, 세종이 2년에 걸쳐 고려 왕조의 어진들을 일일이 모아 불태우거나 매장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 왕조에도 어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1세기에 남겨진 어진들은 대부분 조선 왕조의 것이며 후술할 어진 제작 과정 역시 조선의 기록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어진이 만들어지기까지 
  어진의 제작 과정은 『숙종실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먼저 어진을 만들기 위한 임시 기구인 어용도사도감을 설치했다. 이 관청은 ‘도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던 것으로 봐 왕이 살아있을 때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선 어진을 그리는 화원을 선발했는데 그림과 관련된 일을 맡아보던 도화서에서 뽑거나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을 추천 받았다. 소개된 사람들이 모두 어진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들 중에 솜씨 좋은 인물들을 가리는 시험인 시재를 치러서 대략 6명에서 많게는 13명까지 선발했다. 이렇게 선발된 이들을 어진화사라고 했는데, 용안을 중심으로 그린 ‘주관화사’, 옥체의 덜 주요한 부분을 담당한 ‘동참화원’, 채색 일을 도운 ‘수종화원’으로 나뉘었다.
  어진화사들은 맨 처음 먹을 사용해 초본을 그렸다. 이때 왕이 조정에 나갈 때 입던 강사포·원유관 차림과 왕이 집무를 볼 때 착용한 곤룡포·익선관의 모습 총 두 점을 각각 그렸다. 
  초본이 완성되면 그 위에 비단을 따로 올려 채색했다. 이 과정을 설채라고 하는데 주관화사가 주역을 맡고, 동참화사와 수종화사가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설채에 사용되는 비단은 육조 중 하나인 공조(工曹)에서 직접 만들어서 제공했다. 특히 용포의 색채를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고, 용안을 작업하던 도중 안색이 변하지 않게 주의했다. 설채가 끝나면 신하들이 모여 완성된 어진에 절을 하는 첨배를 거행했다. 
  어진이 제작되는 동안 중간중간 왕이 그림을 시찰하고 부족한 부분을 평가해 이를 반영했는데, 이를 봉심이라 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작가한테 소위 ‘보정’을 요청하는 것과 똑같다. 
  완성된 어진에는 우측 상단에 연호, 존호 그리고 제작 날짜 등을 기록한 표제가 붙었으며 족자 형태로 꾸며 영전에 모셨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처럼 초본을 물에 씻는 세초와 특정 장소에 초본을 묻는 매안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숙종실록』에 어진을 모사하는 과정이 가장 자세히 쓰여 있지만, 정작 숙종의 어진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초기 임금들의 어진은 양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유실됐다 하더라도, 어진 제작이 활발해진 숙종대 이후의 어진들도 현재 그리 많지 않은 점은 확실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연이 있길래 역사의 보배들이 사라진 것일까?

조선 철종 어진 1954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일부 소실됐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어진들의 비참한 운명
  조선시대 이후에도 남아 있던 어진들은 일제강점기(1910-1945)도, 6·25 전쟁(1950-1953)도 아닌 1954년 부산에서 소실되고 만다. 오히려 어진들은 일제강점기에도 각 별궁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창덕궁으로 한데 모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접을 받았다. 이때 모인 어진이 총 46점이었다.
  1950년 9월 28일에 서울이 북한에 수복된 이후 정부는 어진을 포함해 각종 유물들을 부산에 있는 관재청의 창고로 이송했다. 여기서 관재청은 귀속 재산 처리를 위해 설치한 관서를 뜻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쟁이 끝나고도 근 1년 동안 이 유물들을 계속 부산에 방치했다. 당시 부산은 여전히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주택난이 심해져 피난민들은 판자나 천막 등으로 만든 임시 건물에서 생활했다. 이 건물들은 필연적으로 화재에 취약했고, 관재청 주위에 있던 임시 건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화재에 대한 보존 의식이 희박했던 탓에 안전한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유물들은 결국 1954년 12월 26일에 발생한 화재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 사건을 다뤘던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한 임시 건물에서 일어난 불길이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인근에까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문제는 관재청 창고에도 불이 붙었지만 창고의 열쇠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화재를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관재청 창고에 보관돼 있던 46점의 어진 중 일부만이 살아남았다. 이 화재로 숙종의 어진을 비롯해 정조의 어진과 헌종의 어진이 화마 속에 묻혔다.

  복원을 위해서
  이렇게 남은 어진 중에서도 온전한 작품은 몇 없었다. 순조와 그의 적자 효명세자의 어진은 아예 절반이 불에 타 복원을 시도할 수 없었다. 상태가 양호한 철종의 어진조차 그림의 삼분지 일과 입술 부분이 소실됐다.
  그러나 어진이 사라졌다고 해서 이들의 용안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진 않다. 비록 간결하지만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이라는 고서에 지금은 모습을 모르는 숙종, 정조, 순조 그리고 헌종의 어진이 그려져 있다. 또한 어진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 등에서 어진들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태조 어진은 1872년 제작된 이모본 외에도 ‘준원전’이라는 전각에 별개의 어진이 있었다. 이 어진은 6·25 전쟁 때 준원전이 소실되면서 같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나 놀랍게도 1913년 이를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2013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 사진을 참고해 준원전에 있던 어진을 복원했다. 한편 어진박물관에선 2015년에 철종 어진의 소실된 부분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상상화지만 조선조를 포함해 삼국 시대의 임금까지 정부표준영정으로 제작됐다. 정부표준영정은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는 역사적 인물들의 상상화가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그들의 용모를 하나로 지정한 초상화를 뜻한다. 
  2016년엔 세조의 어진 초본이 발견됐다. 완성본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현존하는 어진이 한 점 더 늘어난 셈이다. 사라진 줄 알았던 어진이 다시 세상에 등장하는 걸로 추정컨대 지금도 잃어버린 어진들이 어딘가에서 빛을 보길 기다리지 않을까?

 

 

김재중 기자  oops88755@o.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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