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저, '은밀한 생'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몇 군데 기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읽을 만한 책을 권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때 자신 있게 권하는 책이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다. 꼭 읽어보라고, 기왕이면 빌려 읽지 말고 한 권 사서 옆에 두고, 급히 읽지 말고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며, 특별히 좋은 문장은 밑줄도 치고 필사도 해보라고 권한다.
  ‘모든 강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간다. 나의 삶은 침묵으로 흘러든다. 연기가 하늘로 빨려들 듯 모든 나이는 과거로 흡수된다.’
  첫 문장부터 보통의 소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느껴진다. 사실 내 경우 책의 절반 가까이 밑줄이 그어져 있을 만큼 일단 문장에 매료됐다. 진정한 음악가는 연주가 끝나면 완강하고 분명한 침묵 속에 빠진다. 그것은 울고 싶은 욕구의 극치이다. 나는 바닷물의 수압이 잠수부를 내리누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연주자를 짓누르는 게 침묵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발생은 어떤 목소리에 대한 복종일 수 있다. 어떤 목소리의 억양에 대한 복종. 배우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다. 배우는 것은 태어나는 것에 속한다. 몇 살을 먹었든 간에 배우는 자의 육체는 그때 일종의 확장을 체험한다. 무언가 다른 것에 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배우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타자를 포위해 그의 내면의 집, 내면의 공동(空洞)인 영혼과 사고를 자기가 가진 어떤 비물질적인 것에 의해 점령하는 방식. 패배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온다. 외부 세계에서는 패배가 없다.
  밑줄 그은 문장들을 모두 옮겨적고 싶은 욕망을 견디기 어렵다. 그만큼 이 책의 문장들은 살아 꿈틀거린다. 소설가가 그의 소설을 완성한 순간 소설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저자는 죽고 독자에 의해 소설의 의미는 재구성된다. 소설은 독자의 현재와 만나 미끄러지며 끊임없이 의미의 죽음과 탄생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어떤 소설에도 확정된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 나와 남의 해석이 다르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읽고 난 깨달음에 차이가 발생한다. 하물며 이 책은 단 한 단락을 읽을 때조차도 수없이 다른 독해를 이끌어냄에 놀랍다.
  “겨루고, 대적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날 때마다 시련을 겪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죽이거나 살해당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투다.”(42쪽) 이 결연하고 비장한 문장이 예술가의 창작에 대한 표현임에야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문장에 줄을 긋고는 한동안 상념의 바다에 빠져 창작의 기쁨과 비난의 불쾌감이 공존하는 예술가의 존재론적 고뇌에 대해 생각했다. 앞서 나는 이 책을 ‘빌려 읽지 말고 사서 보라’고 권했다. 두고두고 읽어볼 만한 책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넘쳐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책은 읽기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잠시 빌려다가 읽고 돌려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책표지에는 분명히 장편 ‘소설’이라고 쓰여 있지만 동시에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이라는 수식어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옮긴 이도 이 작품은 ‘소설도 자서전도 철학 에세이도 심리 분석도 명상록도 이야기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두이다.’라고 썼을 만큼 장르 구분이 모호하다. 장르가 모호하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이 작품 전체를 한 편의 시(詩)로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 할 수만 있다면 통째로 외워 내 머릿속에 넣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속에 사랑과 기원, 침묵과 언어, 공백과 환상, 결여와 같은 철학적 명제들이 녹아들어 있다. 다시 말해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다. 

마기영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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