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명기 저, 장편소설 『하린』

  문학은 장르를 막론하고 글쓴이와 무관할 수 없다. 자서전이나 수필만이 아니라 시나 소설, 희곡까지도 결국은 글쓴이의 삶에서 비롯된 인식과 사유의 결과물이다. 허구를 마음껏 부리는 대표적 장르인 소설마저도 작가의 정서와 가치관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작가가 자전소설임을 표방한 작품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장편소설 『하린』은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해 결연히 목숨을 끊은 충정공 민영환의 자손인 민명기가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쓴 작품이다. 몰락해가는 충정공 집안에 시집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꿋꿋이 살아낸 하린이라는 여성과 주변 인물들의 삶이 실제와 허구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작가 자신도 ‘은기’라는 이름으로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한다.
  작가 민명기는 73세에 이 글을 썼다. 집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해 들은 마지막 세대로서, 충정공 이야기를 소설로 써야 한다는 책임과 열망을 늘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남편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일과 공부, 육아를 병행하며 생활하느라 바빴던 그녀는 은퇴하고서야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작가 나이 73세 때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전쟁통에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들으며 자란 작가는 들은 내용과 허구를 버무려 장편소설로 탄생시켰다.
  ‘내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족히 될 것이다’라는 어른 들의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소설이라는 것은 특별한 경험의 전달이라든가, 단순히 사건의 연결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 소설에는 개연성 있는 허구가 필요하고, 나아가 허구이든 실제든 사건들이 빚어내는 함축된 주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주제가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한다. ‘문학(소설)은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제임스 우드의 말은 소설이 갖는 재미를 넘어서 우리 삶과 맺는 변증법적 관계까지도 아우르는 테제다.
  ‘여름 기린’이라는 의미의 하린(夏麟). 근현대 격동기 빈한한 삶을 산 여인의 이름으로는 다소 로맨틱하다. 그러나 각박하고 신산한 삶을 살면서도 맑은 눈을 잃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과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작가는 이 첫 작품의 집필을 마친 뒤 곧이어 충정공 민영환의 스토리를 담은 두 번째 소설, 『죽지 않는 혼』을 썼다. 민영환이 자결한 후, 그의 옷에서 피가 흘렀고, 그 자리에서 혈죽(血竹)이 돋았다는 신비로운 사실에서 제목을 따온 듯하다.
  어머니의 인생,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의 인생을 소설로 쓴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 서사를 허구와 뒤섞는 과정에서 작가는 어떤 구성을 계획하고, 어떤 메시지를 심어놓았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대하드라마 <대장금>의 극본을 썼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실제 서사의 빈틈을 헤집고 자기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즐거움은 소설을 쓰는 사람만이 느끼는 묘미일 것이다.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 70대에 첫 소설을 쓴 작가와 같이 우리도 삶을 글로 쓰는 재주를 발휘해보지 못하란 법은 없다.『하린』을 읽으며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마기영(국어국문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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