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1915년 전북 고창 출신인 서정주 시인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벽’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했다. 초기 시풍은 인간의 원죄를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으나, 후기에는 불교 사상이나 동양적 사상을 소재로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시를 썼다. 그는 친일, 친군부적 행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1952년 전쟁의 불씨가 잦아들 무렵, 시인은 광주의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의 상처가 낫지 않은 우리나라의 모습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시인은 그런 현실과 달리 창 너머로 보이는 의젓하고 넉넉한 모습의 무등산을 보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1연은 가난이 인간 본연의 모습까지 가릴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에게 가난은 낡아서 해진 옷일 뿐이어서, 눈부신 햇빛 아래 짙은 초록빛으로 우직하게 서 있는 산 같은 우리들 본연의 순수함은 가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2연에서는 푸른 산이 깨끗하면서 기품 있는 풀을 길러내듯 궁핍하더라도 자식들을 소중하게 기를 수밖에 없다는 긍정의 자세를 말한다. 3, 4연은 앞뒤로 겹쳐 있는 무등산이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처럼, 삶이 고난을 맞닥뜨리는 순간에도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믿음으로써 꺾이지 말고 이겨내야 한다는 뜻을 전한다. 마지막 5연에서는 ‘가시덤불 쑥구렁’으로 표현된 역경을 겪는 중일지라도 ‘옥돌처럼 묻혀 있’는 것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라는 삶의 태도를 노래하고 있다.
  우리 문학에서 ‘산’은 전통적으로 무한한 인내심과 덕을 가진 불변의 존재로 표현되어 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등산 역시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변함없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등산은 주변 환경이 변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시인은 그런 무등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자세에 대해 고찰했다. 시인은 물질적인 궁핍이 사람을 힘들게 할 수는 있으나, 사람의 본질은 가릴 수 없으며 여유 있고 의연한 태도로 가난을 이겨 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굴곡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항상 외적, 내적 역경 속에서 살아왔다. [무등을 보며]는 누군가에겐 자극으로, 혹은 응원으로 다가갈 수 있다. 역경 앞에서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 안에 있는 근원적 순수함을 잊지 말고 의연하게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

홍승진(한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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