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루에 앉아서

 대전에서 정읍까지 두 시간. 정읍에서 선운사까지 한 시간. 산간의 긴 터널을 지나자 동백의 고장이었다. 물론 아직 동백이 피기 전이다. 대신 비가 왔다. 나는 우산을 들고 가로수길을 지나 선운사에 도착했다. 윤대녕은 이곳 산사를 배경으로 상춘곡을 집필했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에 승려 검단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유재란의 혼란 중 전소돼 광해군 때 재건된 후 오늘에 이른다. 작가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입을 빌려 선운사 만세루를 설명한다. “선운사가 백제 때 지어졌으니 만세루도 아마 같이 맨들어졌겄지. 그러다 고려 땐가 불에 타버려 다시 지을라고 하는디 재목이 없더란 말씀야. 그래서 타다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서 어떻게 다시 맨들었는디 이게 다시없는 걸작이 된 거지” 미당의 말이 정말인지 궁금했다. 만세루에는 불탄 흔적이 남아있을까? 그런데도 다시 굳건하게 서 있다는 걸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예전에 누군가 상춘곡을 읽고서 쓴 글을 보았다. 그는 전란으로 잿더미가 된 만세루와 그 뒤의 재건과정에 인간관계를 연관 지어 고민했다. 잿더미가 된 지난날들과 회복 가능성에 대해. ‘인연’으로 묶인 우리의 신비로운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지고 걷는 사이 만세루에 다다랐다. 소설의 화자는 여기에서 벚꽃을 기다렸다. 옛 인연과 재회하기 위해서. 나도 벚꽃을 보고 싶었다.
  “선생의 말씀대로 만세루는 타고 남은 것들을 조각조각 잇대고 기운 모양으로 대웅전 앞에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어느 기둥 하나 그야말로 온전한 것이 없었습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내게도 만세루의 기둥이 어설퍼 보였다. 그러나 만세루는 화마를 이겨냈다. 미당의 말을 듣고 다시 만세루를 찾은 화자는 기다림 끝에 벚꽃을 본다.
  만세루는 현재 방문객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으며, 선운산 3대 진미 중 으뜸인 작설차를 맛볼 수 있다. 선운사는 그 밖에도 템플스테이, 문화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두말 말고 일단 가보시라는 얘기다. 운이 좋으면 벚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어느새 멎었다. 나는 우산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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