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는다

박찬인 교수, 불어불문학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는 말이 있다. 길을 가는 인간이란 말이다. 우리 인간은 두 발로 걸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짐승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걷는다는 것은 느린 움직임이다. 느리기 때문에 세상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보게 해준다. 자연의 침묵조차 듣게 하며, 세상에 허덕이던 우리 영혼의 숨을 고르게 한다. 어찌 보면 오직 느림만이 우리를 세상의 매력 속으로, 자연의 재미 속으로, 그 틈새 안으로 이끈다. 둘레길, 오솔길, 에움길에서 우리가 만날 때, 우리는 마침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용도와 소유의 개념으로 세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나 이전에도 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있을 자연을 만나고 느끼면서 행복한 것이다. 그런 넉넉함 때문에 풍경도 보이고 ‘나’도 보인다. 고은 시인도, 그래서,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 보았을 것이다. 걷기는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꾸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존재의 총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부채질한 속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우리는 자동차의 노예, 집의 노예, 직장의 노예, 관계망의 노예로 전락했다. 돈, 획득, 소유, 독차지 따위의 어휘들만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많은 이들이 어느 순간 걷는다는 원초적 본능을 망각하고 속도의 질주만을 경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점점 사적 공간에 틀어박혀, 때로는 몸을 완전히 망각하고, 컴퓨터, 스마트폰, 온라인 기반의 활동 등에 몰입한다. 여가시간 조차도 그것들의 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많은 이들이 삶의 기쁨, 삶의 역동과 같은 중요한 것들을 잃고, 잊고 살아간다.
  보통 평범한 시민으로서 나는 도시건 시골이건 모든 열린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음을 사랑하고, 기꺼워하며 또 향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 같은 방학의 날에는 일상의 책무에서 벗어나 꿈을 꾸며 걷고 추억하고, 사유하고, 기도하며 행복을 느낀다. 루소와 보들레르, 칸트와 하이데거 등 많은 이들이 걸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위업을 이루었다. 걷는 시간에 느끼는 건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도피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 인생을 여행이나 소풍에 비유하는데, 여행이나 소풍 혹은 산책을 떠나는 일은 그 비유를 구체화하는 일이다. 몸과 상상력을 통해 인생을 구현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역시 걷기를 사랑하는 철학자 리베카 솔닛이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라고 한 언술은 늘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대자연은, 산이든 숲이든 아니면 바다든, 신비하고 고유한 힘으로 인간을 위로한다. 숲 속에서 나는 새소리와 더불어, 흘러가는 구름과 더불어 안정과 활력을 얻는다.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치료받으며 행복을 느꼈던 또 다른 사람, 월든의 저자 소로(Thoreau)는 “숲을 걸었더니 내가 나무보다 커졌다(I took a walk in the woods and came out taller than the trees)”고 했다. 걸을 때에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생각을 펼칠 수 있다. 그래서 걷는 게 좋다. 그래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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