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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충대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모래의 시간
충대신문 | 승인 2019.05.28 18:25|(1152호)

  새벽 두 시에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은 하이든의 94번 교향곡 같았다. 포르티시모로 강하게 청각을 두드리는 불친절한 볼륨. 집에서 온 전화였다. 어제 작업 현장에서 삼킨 모래가 어금니에 씹혔다. 으드득 소리를 내며 씹히는 모래 알갱이. 뇌까지 송곳이 쑥 들어오는 시큰한 기분이었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옆에 누워 있던 반장이 멍하니 진동을 듣고만 있던 내 허벅지를 세게 발로 찼다. 피멍이든 정강이가 욱신거렸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부고였다. 어머니도 형도 아닌, 미처 생각도 않던, 아버지의. 어쩌면 가장 위태로웠던 아버지. 순천에 있던 아버지는 단골 소주방에서 급사했다. 아버지는, 보고 있더라도 보이지 않던,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없어진 존재였다. 나에게 아버지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미 희미하다 못해 사라진 아버지의 무게는 그의 죽음이 새삼스럽다는 느낌마저 들만치 가볍고 사소해져 있었다.
  두 시간을 뜬 눈으로 보냈다. 새벽 네 시다. 숙소 구석구석에서 알람이 울린다. 어둠 속에서 꾸물꾸물 그림자들이 일어선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 죽음과 생성의 파도소리가 휘몰아친다. 가래 끓는 한숨 소리들이 멎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불이 켜지자 검게 그을린 얼굴들 위로 빛이 쏟아진다. 눈을 찡그리는 그들의 마른 입술이 하는 말. 시발. 하루를 여는 첫 언어다. 그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닌,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도 아닌.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바지 주머니에 각반과 장갑을 쑤셔 넣는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면서 작업화에 대강 발만 욱여넣은 채 신발 끈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온다. 달이 환한 새벽하늘에서 칼바람이 소나기처럼 내린다. 거리 곳곳에서 하나 둘 바닥을 치는 작업화 밑굽 소리가 늘어난다. 모두들 억지로 걷는다. 인대가 굳어버린 발목을 질질 끈다. 시체들의 밤을 보는 것 같다. 굴삭기로 뇌를 파인 듯 어딘가 인간으로서의 정신이 결핍된 얼떨떨한 존재들. 모두 자기 자신의 부고를 듣고 일어난 존재들처럼.
  사무실 공기는 텁텁하고 탁했다. 전국 각지 작업 현장에서 달고 온 모래들이 떠다닌다. 연장 가방을 들어 올리는 순간 덜 잠긴 자크 사이로 망치와 하네스가 쏟아졌다. 구토처럼 쏟아지는 장비들 끝으로는 안전모가 튀어나와 사무실 문밖으로 사정없이 굴러갔다. 새벽 거리에 텅 빈 머리통이 방황한다. 그 공명음이 불쾌감을 넘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반장이 운전석 창문을 열고 “야 이 개새꺄” 하고 호통을 지를 때까지도 멍한 눈으로 공명이 녹아내리는 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가득 매웠으나 보이지 않는, 분명히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봉고차에서도 부족한 잠을 채울 수 없었다. 고질병인 멀미에 시달리며 간신히 현장에 도착했다. 하늘엔 새벽 해가 축축하게 걸려 있다. 설익은 빛줄기 아래로 지옥이 드러났다. 부연 먼지의 반사광을 받는 철판 문이 안전제일이라는 미소를 내걸고 인부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끔찍하다. 인부들은 고개를 돌려 함바집으로 몰려간다. 꾸역꾸역 똥국을 퍼 먹은 뒤 걸쭉한 침을 뱉으며 담배를 태운다. 국민 체조를 하고 형식적인 조회와 브리핑을 마치고선 팀들은 각자 현장으로 투입된다. 내가 속한 팀은 시스템 동바리다. 테크놀로지 용어와 막노동 용어가 혼재된, 골치 아프게 복잡하면서도 몸이 으스러지도록 빡센 노동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쇠기둥을 쌓아 얼기설기 엮어 정글짐 모양의 뼈대와 지지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 낸 쇠의 영역은 건축 과정에서 자재를 운반하는 다리가 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콘크리트가 강도를 얻기까지 하중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건축의 근간을 책임지는 중추신경인 셈이다. 다만 이렇게 세운 동바리는 콘크리트가 다 굳으면 해체되어야 한다. 더는 필요도 쓸모도 없으니까. 창문이 달릴 때쯤이면 외벽 뒤에 감춰진 동바리의 굳건하던 힘은 완벽하게 잊힌다. 내부를 지탱하고 있던 힘은, 세상의 모든 뒷바라지가 그러하듯 그렇게 잊히고 만다.
  오전 작업이 끝났다. 점심을 먹고 두 시까지 오침 시간이다. 볕을 피한 그늘에는 주운 판자들을 깔고 누운 인부들이 수산 시장의 오징어처럼 아무렇게나 퍼질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바람이 모래를 실어와 그들에게 뿌려댄다. 모래를 먹으면서도 결코 깨지 않는 그들. 나는 쇠파이프에 정강이를 찧어 부어오른 상처가 아직도 쑤셨고 진 빠진 손목이 덜덜 떨려 꽉 맨 작업화 끈을 푸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통증 때문에 살아있다는 느낌은 이제 신물이 난다. 자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부고가 몰고 온 지독한 불면이 내 정신을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인부들을 보며 나는 관 속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늙은 인부들의 얼굴에선 모두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사십대나 오십대, 심심찮게 보이는 예순을 넘긴 노인들. 스물여섯의 나는 늘 보기 드문 구경거리가 되었다. 하나 이 일에 필요한 건 체력도 젊음도 아니다. 간절함, 오직 그 뿐이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란 뜨겁게 달군 시간에 자신의 삶을 구워 번듯한 인간을 빚어내는 과정이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거의 다가 시간으로 인생을 굽던 중 도중에 깨어졌거나 운명의 장난에 찬물을 맞은 사람들이다. 이미 괴상한 모양으로 굳어버렸다 한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바람은 칼을 갈고 들이닥치는데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너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학비와 생계비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그토록 멀어지려 기를 쓰던 아버지의 삶과 같은 처지를 보내고 있는 현실에 절망도 조금 했었으나, 이 바닥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묘한 동질감이 내 감정의 발목을 붙들었고 그것은 내게 아버지에 대해 연민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권유하고 있었다.
  내가 열두 살 때 아버지는 대구에서 하던 일을 접고 순천에 사무실을 차려 터를 옮기려 했다. 분명 대구 쪽 업계에서 뭐가 또 꼬인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시에 아들내미 중 하나는 데려가겠다는 느닷없는 선언을 했고 그 바람에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었다. 물론 하나란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형은 똑똑했고 합리적인데다 생각과 말에 논리가 있었으므로 가장이라기엔 철이 없는 편인 아버지의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단순히 덕 없는 사장의 밑에서 일하기 싫다는 이유로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던 보일러 수리공을 때려치운 것도 모자라 잘못 서게 된 보증으로 빚까지 졌으면서도 무모하게 시공 사업에 뛰어들었다. 전부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선택들이었다. 사업을 벌이면서 아버지는 명절에나 한 번씩 집에 돌아오는데다 벌이마저 소박했다. 순천에 가서 하겠다는 일도 설비나 건축 같은 막일들을 의뢰 받아 출장을 나가는 일이랬다. 빌어먹는 일.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을 그렇게 불렀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일을 빌어다가 겨우 한 끼를 때우는 천한 일. 청승맞고 지저분한 건 딱 질색인 어머니의 성격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도, 참아줄 수도 없는 삶이었다. 아버지는 대체 왜 찬란할 것 없는 삶으로 아들을 데려가고 싶어 했던 걸까. 아버지는 몰랐을까. 집안에 감도는 분위기를. 아버지 없이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틀 안에 당신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음을. 세 사람이 둥글게 모여 앉아 아버지를 문 밖에 세워 두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낯선 어색함으로 당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결국 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반은 강제적이었고 반은 자발적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고집을 끝까지 막아 낼 수는 있었겠지만, 처절하기까지 한 아버지에게 측은함을 느낀 여린 내 마음까지는 짓누르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를 존중했다.
  “집 생각나면 언제든 돌아와라.”
  나는 어머니의 말을 은장도처럼 품고 지냈다. 순천에 내려온 첫 날부터 나는 집이 그리웠다. 사무실에 딸린 방은 우리 집보다 조금 더 큰 다섯 평 남짓한 단칸방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을 나가 오후면 돌아왔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모래에 절은 작업복을 빨간 고무 다라이에 던져 놓고 세수를 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밥을 짓는 대신 동네 소주방으로 나를 데려가 검붉은 얼굴을 한 아저씨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막내아들을 자랑하면서 천덕스러운 농담 따먹기에 푹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곳이 싫었다. 노인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고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싫었고 담배 냄새가 싫었고 가래 뱉는 소리가 싫었고 희뿌옇게 화장이 뜬 마담들의 음탕한 시선을 받는 것도 싫었다. 어느 날 소주방에 앉아 언제나처럼 마음속으로 집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갑자기 집이 내게서 멀어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작은 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내가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작아져 있는 문을 보았을 때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주방을 나서면서 나는 그간 억지로 감춰왔던 응어리를 꺼냈다.
  “아버지. 우리 집에 한번 가요.”
  침묵. 텅 빈 골목에는 부는 바람 소리만 돌아왔다. 밤거리를 또랑또랑하게 울리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취하지는 않았을 터인 아버지는 다만 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취한 듯 입을 닫은 채 비틀대며 걸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나를 소주방에 데려가지 않았다. 저녁상을 방에다 차렸고 된장찌개와 김치, 그리고 빠지지 않고 소주가 상 위로 올랐다. 홀로 소주를 따르고 들이키는 아버지는 늙고 외로워 보였다. 어머니와 통화로 어김없이 싸운 날이면 나를 잠자리에 뉘인 채 아버지는 가끔 홀로 소주방에 다녀오곤 했다. 어린 나이에 조금 충격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고독한 낯빛은 나를 가만히 그 시간 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여름방학 첫 날, 아버지는 꼭두새벽에 나를 깨웠고 그날부터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작업 현장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조수석 시트와 바닥은 늘 모래투성이였다. 아버지의 낡고 지저분한 트럭. 멀미가 심했던 나였지만 그걸 타노라면 멀미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아버지는 쉴 새 없이 차량, 자재, 도구 등 모든 물건과 환경에 숨어 있는 죽음에 대한 주의를 거듭 강조했다. 슬레이트 지붕을 뜯어내다가 발을 헛디뎌 추락한 사람, 크레인의 실수로 떨어지는 철근에 깔려 그대로 납작해진 사람, 자동 톱날에 장갑이 말려들어가 손가락이 절단된 사람. 언제나 구역질나고 무서운 얘기뿐이었다. 현장에서 아버지는 내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간혹 심심한 듯 어슬렁거리는 어린 내게 인부 아저씨들이 쉬는 시간에 연장 다루는 요령을 가르쳐 주곤 했다. 한 달 가까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나는 어느새 어깨 너머로 배운 손놀림으로 기술공들의 보조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한날, 나는 연장 더미에서 전동 드릴을 찾다가 우연히 쇳덩이로 된 주물틀 하나를 발견했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부터 아버지는 항상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어떤 의뢰가 들어와도 거절은 없었다. 아버지는 이런 일까지 했었던 걸까. 그러나 이내 무언가 섬뜩한 생각이 커터 칼날처럼 뜨겁게 머릿속을 그었다. 너무 늦어버린 어느 때, 나는 늘 그 때란 것을 생각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 때란 것이 이미 지나버린 건 아닐까. 갑자기 싸늘한 가슴에 두려움이 흥건히 젖어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쇳물처럼 녹아 아버지가 짜 놓은 틀 안에 스며든 건 아닐까. 이미 내 뜻과 상관없이 아버지의 틀에 맞춰 차갑게 굳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중에 깎아내려 해도 이미 너무 단단히 굳어버려, 어떤 칼로도 조각해낼 수 없게 된 내 삶이 유년의 나를 저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열네 살 팔월의 저녁 무렵, 나는 순천 터미널로 달려가 대구행 버스표를 끊어 탔다. 혹 아버지가 알아채고 쫓아오는 건 아닐까. 아버지의 두꺼운 손이 차창보다 낮게 웅크린 내 목덜미를 덥석 집어 버스 밖으로 끌어 내리는 건 아닐까. 기다림이 영겁처럼 느껴지던 중 차체에 시동이 걸렸다. 숨을 죽였다. 낯선 일정한 진동 속에 안정을 찾았다. 그때 익숙한 발소리가 진동을 부수고 끼어들었다. 시멘트에 금이 가는 소리. 작업화의 밑굽이 세게 부딪치는, 다급한 달음박질의 소리다. 발아래서 모래 알갱이가 짓이기는 소리, 톱날 작업장에서 손가락이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만큼 다급한, 지붕 밑으로 푹 꺼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채려 할 때만큼 다급한, 머리 위로 쇳덩어리가 추락할 때 소리를 지를 때만큼 다급한, 죽음을 멈춰 세울 때와 다름없는 비명에 가까운 발걸음의 울음소리. 그것이 내 고막을 물어뜯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뜨지 않으리라. 차체의 바퀴 소리가 그 소리를 뭉개버릴 때까지 뜨지 않으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으리라. 아무것도 책임질 게 없으리라. 이대로 자다가 일어나면 집에 도착하리라.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구르고 고질병인 멀미가 올라오고 있었다.
  대구로 온 나는 어머니와 형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전학 수속을 밟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에 다녔다. 형과 어머니의 리듬에 아버지와 규칙 따윈 없는 삶을 살던 나는 불쑥 끼어든 불협화음이었다. 흐름을 바로 잡아 주는 건 형이었다. 버릇이 없달까 뭘 모른달까 아무튼 형의 심기를 건드리는 날이면 나는 세 평짜리 좁은 단칸방의 구석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견뎌내야 했다. 기우뚱했던 팽이는 형의 채찍질로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내 성적표를 보더니 학원을 끊어다 주었다. 그러고는 어머니회에 일을 알아보러 나가기 몇 시간도 전에 집을 나서서는 공장에서 양말을 떼 왔다. 중학교 졸업식 날, 나는 시장 바닥에서 양말 두 켤레를 묶어 지폐 한 장에 팔던 어머니를 피해 돌아가느라 아주 먼 길을, 꽃다발을 끌어안고 향기에 취한 동창들 틈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겨울 끝 무렵에 부는 바람은 시려도 맑고 깨끗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날 바람결엔 모래 알갱이가 불어 내 얼굴을 긁어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나는 밤 열 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고, 어머니는 식당일로 열두 시나 되어서야 돌아왔다. 형은 복무기간이 가장 길다는 공군에 입대해있었다. 열일곱의 겨울날, 오래된 보일러가 기어이 탈이 났다. 어머니는 추위는 무서운 줄 몰랐지만 기사를 불렀다간 얼마를 달랄 지가 무섭다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집은 눈만 붙이는 곳이니 옷을 껴입고 자면 괜찮을 거라 달랬다. 하지만 어느 한밤 중 내가 단 한 번 뱉은 재채기에 어머니는 이튿날 아침 일찍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그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방은 그윽한 온기로 가득했다. 포근한 공기가 너무 낯설어 선뜻 앉기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손바닥을 장판 위에 내려놓자 언 손이 따끔했다. 잠시 후 뜨끈한 열이 전해졌다. 그날 밤 어머니와 나는 아주 가벼운 티셔츠만 입은 채 잠이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아주 새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하얀 천을 좋아했다. 우중충한 색은 싫다며 한겨울에도 손빨래를 고집하는데다 걸레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세제를 팍팍 넣은 스댕 다라이에 푹 삶곤 했다. 햇볕에 바짝 널어 둔 하얀 옷가지들이 바삭하게 마르면 어머니는 코를 가까이 대 하얀 천에 묻은 따뜻한 햇볕 냄새를 맡았다. 어린 내가 놀이터에서 흙을 묻혀 온 날이면 어머니는 하루에도 두 세 번은 빨래를 했다. 없이 자라도 아들을 초라한 꼴로 밖에 내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유난스러운 결벽에 대해 나는 잊을 수 없는 모순을 기억한다. 우리가 사는 달동네의 집들은 재래식 화장실을 쓰곤 했는데 당시 우리처럼 세 들어 살던 집은 다른 식구와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던 풍경이 흔했다. 불편한 건 둘째치더라도 무엇보다 그곳은 어깨너비로 벌린 다리가 한참 짧은 꼬마들에겐 똥간에 빠져 죽은 아이들의 괴담이 떠돌아 늘 공포의 장소였다. 나도 다리 길이가 한참 모자랄 땐 부엌 시멘트 바닥에 어머니가 깔아주는 신문지 위에다 대변을 보곤 했다. 다섯 살의 어느 날 밤, 나는 불현듯 잠에서 깨 어머니를 보챘다.
  “엄마 나 똥.”
  하필 바깥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머니 곁에서 내가 쪼그려 앉아 대변을 보는 동안 갈라진 천장 사이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쿵쿵 정수리가 젖었다. 그러다 이내 이상하게도 바깥의 빗소리는 여전한데 부엌에 내리는 비만 뚝하고 그쳤다. 몇 분 동안 씨름하던 내가 볼일을 마치자 어머니는 신문지를 싸 주인방의 눈치를 보면서 화장실로 달려가 그것을 비워냈다. 멀리서 지켜보던 내 눈에 비친 검게 젖어 들어가는 어머니의 하얀 등. 어머니의 목덜미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모래다. 판자로 덧댄 화장실 천장에서 젖은 모래가 흘러내려 어머니의 목덜미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비오는 날 재래식 화장실의 악취는 코를 쑤시다 못해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다. 친구가 놀러 오기라도 하면 대문 앞에서부터 헛구역질을 하다가 뒤돌아 도망쳐 버리고 만다. 어머니는 뛰어 돌아와 목덜미와 손을 씻어 내고는 축축한 검은 등을 그대로 뉘이어 잠자리에 다시 들었다. 어머니는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사람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형과 어머니 사이 한 가운데 누운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우리가 덮는 이불은 늘 배설물 냄새가 났다. 불현듯 으드득 소리가 났다. 어머니에게서 미처 닦이지 않은 젖은 모래, 그것이 이불에 들러붙어 내 입안에 들어 온 것이다. 아무리 곤해도 코 같은 건 골지 않던 어머니의 고요한 숨결과 잦아든 빗소리의 가운데서 나는 오래토록 머릿속을 맴도는 으드득 소리에 겁에 질려 잠들 수 없었다.
  오침 시간을 뜬 눈으로 보내고 오후 작업을 간신히 끝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리고는 반장에게 이젠 더 이상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뭐라는 거야 새끼가. 남은 작업 칠 거 알면서 헛소리야!”
  나는 아주 차분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순간 반장의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나를 뚫어져라 살피기 시작했다. 그건 여길 떠나려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핑계와 변명을 가려낼 때의 눈빛이었다. 잠시 후 반장이 입을 열었다.
  “소장님께 문자로 계좌 보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인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반장의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 이제는 노인들만 남은 숙소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한참은 더 높이 올라가야할 건축물의 뼈대를 떠올렸다. 건물이란 꼭 사람의 피와 살갗으로 짓는 청춘의 무덤 같았다. 얼마나 많은 모래가 쌓여야 다 지어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젖어야 단단해질까.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사람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성경의 구절에는 일리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우리들이 시간 속에 깎여 나가는 흙인형 같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소멸하는, 한 없이 작아지는 흙뭉치.
  숙소를 나와 보니 형이 막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집에 들러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고 온 모양새다. 근처 술집과 편의점 조명이 희미한 불빛으로 형의 차를 비추고 있었다. 설핏한 불빛에 그림자가 져 차 문짝에 움푹 팬 흉이 선명한 굴곡을 드러내며 도드라졌다. 담배를 피우던 형은 주먹을 꽉 쥐고는 앞 범퍼를 세게 쳤다. 튀어나온 눈깔처럼 덜렁거리던 범퍼가 다시 들어가 박혔다. 차체의 은색 광택은 비 오는 날의 아스팔트 색으로 바래졌고 여기저기 흠집과 코팅이 벗겨진 초라한 표면은 군데군데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앞 유리에는 터져죽은 벌레들의 잔해가 얼룩덜룩 붙어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할부로 긁은 중형차는 고작 일 년 만에 폐차 꼴이 되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가득 짐이 쏟아졌다. 비타민A, 어린이용 비타민D, 프로바이오틱스, 프로폴리스, 마그네슘을 비롯한 온갖 비타민 상자들과 팸플릿,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A4 서류들로 난장판이었다. 그것들을 뒷좌석으로 옮기려 해도 이미 우산이니, 차량용 디퓨저니, 가습기 같은 병원장들에게 나눠줄 판촉물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트렁크도 사정이 매한가지였다. 대충 던져 놓고 타라는 말과 함께 형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일렁이는 라이터의 불꽃이 형의 얼굴을 비췄다. 서른의 형. 무척이나 수척하다.
  형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물류 공장에 들어가 얼마간 돈을 모은 뒤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다. 전투는 장기전이 되었고 합격 문자가 오는 곳은 늘 가기를 꺼려했던 제약 회사 영업직뿐이었다. 형은 어머니에게 다른 곳에 좀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에 자소서 강의를 결제 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반나절 후에 형이 들어 두었던 주택 청약 적금을 깨자고 말했다. 그건 고백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이제 낭떠러지라는. 형은 맏이였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합리적이어야만 했다. 당시 허리가 아파 검진을 받고 온 어머니에게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목에만 세 개의 디스크가 발견 되었고, 그 무렵에 맞춰 형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를 쓰고 도망쳐오던 제약 회사 영업직에 쫓기듯 입사했다. 형이 세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할 때 나는 그러다 죽는다고 좀 끊으라 했다. 형은 내 잔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손가락을 튕겨 불꽃에 담배를 태웠다.
  “살려고 핀다.”
  마흔이면 암 하나 정도는 달고 다닐 거라고 말하던 서른의 형. 대기업에서 출시되는 약들을 밤 세워 공부하면서도 자기에겐 써 먹으려들지 않던 형. 원래 중국집 아들이 자장면 같은 거 안 먹는다면서 약들을 지긋지긋해 했지만 간혹 집에 들렀을 때 내 책상 위에는 항상 영양제가 쌓여 있곤 했다. 담뱃불이 다 타자 형은 시동을 건다. 과속이 생활화 되어 있는 형의 차를 타고 가면서 내장 아래 깊은 곳에서 멀미가 올라온다. 삶은 너무 어둡고 빛을 밝혀주는 불꽃이 튀는 순간은 너무나 짧다. 희미한 빛이라도 잡기 위해 도화선에라도 불을 붙이는 아이러니한 삶. 형은 언젠가부터 그 죽음의 불꽃을 꽁무니에 붙인 채 미친 듯이 달려 나가야하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장례는 아주 조용히 치러졌다. 식장의 분위기는 단출하고 초라했다. 그 시절, 쌀이 떨어졌으니 돈 좀 부치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도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만할 뿐 아버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소주방에서 인부들의 고기값을 계산했었다. 그렇게 자신의 가족보다는 다른 가족을 챙겼으면서, 우리 가족의 것들을 찢어선 남의 식구의 입에다 넣어 주었으면서도, 끝내 마지막 가는 길에 아버지는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했다. 형과 나는 남아도는 수육을 접시에 가득 담아 큰 그릇에 담은 육개장과 밥과 함께 퍼먹었다. 어머니는 흰 쌀밥에 김치를 얹어 먹었다. 여느 가족의 저녁 식사 같은 풍경처럼. 그때 어머니가 대뜸 아주 낯선 말을 꺼냈다.
  “내일 바람 쐬러 안 갈래?”
  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없었다, 단 한 번의 가족 여행조차도. 여행. 집이 아닌 낯선 곳으로 떠나 경치를 구경하거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여유를 부리며 노는 것. 쉰다는 사치. 그건 우리 중 그 누구도 꺼낼 수 없던 말이었다.
  발인까지 마치고서 우리는 집에 돌아왔다. 형은 차의 짐을 모조리 빼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차 바닥에는 언제 흘렸는지 모를 캔 커피가 찐득하게 눌러 붙어 있었다. 그런 꼴을 못 본 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기껏 매무새를 가다듬은 외투를 벗고 소매를 걷어붙인 뒤 챙겨온 물티슈로 차 바닥을 박박 닦기 시작했다. 화장 위로 땀이 흐르는 어머니를 보며 형은 좀 냅두라고 목청을 긁어대며 말렸다.
  어머니는 바다가 보고 싶다 했다. 첫 여행에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포항은 안성맞춤인 목적지였다. 평일 오전 도로는 한산했다. 고속도로 위를 달려가며 지방을 쏘다니는 화물 트럭만 수십 대는 보았다. 아버지의 포터 트럭과 똑같은 차가 우리 옆 차선을 빠르게 지나쳤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트럭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뒤쫓아오는 화염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도화선 위의 곡예사 같았다. 트럭이 급정거를 밟는다면 뒤에 실은 화물들이 관성으로 인해 일제히 앞으로 쏠릴 것이다. 정지와 동시에 운전자는 피와 살로 나뉜 흙먼지로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들은 천천히 달리는 법이 없다. 어쩌면 사실 트럭이란 천천히 달리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걸지도 모른다. 눈으로 트럭을 쫓다가 급하게 차선을 바꾸는 움직임에 다시 멀미가 올라왔다. 나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트럭이 달리던 차선을 바라보며 내게 멀미를 잊게 했던 아버지의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아들과 도로를 아주 오래오래 달렸던 아버지의 속도를.
막힘없는 도로를 달려가니 금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래사장과 바다, 끝을 모르게 뻗어나가는 푸른 하늘. 나는 작은 감탄을 불렀고 어머니는 차창에 이마를 붙여 머나먼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만이 고개를 앞으로 빳빳이 세운 채 차를 몰아갔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 사이로 나는 작고 여리지만 선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따, 시원하이 좋네.”
  좋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형은 멀찌감치 떨어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멈춰 섰다. 바람이 불었다. 모래가 날려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래가 어머니나 형이나 내 몸에서 깎여 나간 생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분진이 되어버린 아버지처럼 우리도 서서히 바람에 깎여나갈 것만 같았다. 이 여행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견으로 시작되었듯이.
  조금 걷다가 모래사장 한 편에 쌓인 사구를 발견했다. 모래가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모래 언덕. 모래시계 같은 것. 시간이 흐르면 점점 낮아지다가 마침내 가지고 있던 모래를 모두 소진해버리는, 시작과 끝이 명확한, 인생 같은 것. 바람이 다시 불었다. 바람은 사구의 끄트머리를 한 줌 쥐어 달아났다. 날아가던 바람은 쥐었던 모래를 어느 둔덕 위에다 올려놓곤 아주 가볍게 떠났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바람이 부는 건 모래를 깎는 일일까, 모래를 쌓는 일일까. 줄어듦과 늘어남, 낮아짐과 높아짐. 그 질량 보존의 법칙 같은 현상을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깎여 나간 시간과 생도 어딘가에서 부피를 가진 채 쌓여 있는 걸까.
  돌아오는 길엔 비가 내렸다. 도로가 정체되어 올 때 걸렸던 한 시간을 이미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다고 말하기까지 걸렸던 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양이 머릿속에 부풀어 오르는 것에 집중했다. 어머니의 시간이 거침없이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들여다본다. 그 한 시간을 위해 걸려야 했던 더 많은 시간을. 삼십 년을.
  어머니의 시간, 어머니의 사구는 스물여섯에 비해 얼마나 낮아졌을까. 아들 둘에게 깎아다 준 삼십 년, 그 침식의 시간동안 내부에서 버티던 심지는 얼마나 강했던 걸까. 어머니의 모래, 나는 그것을 얼마나 집어 삼켜왔을까. 내가 높아지기 위해, 단단히 굳기 위해, 나는 얼마나 어머니의 모래를 무감각하게 빼앗아 온 걸까. 그런 나는 여태 어머니에게 내 모래를 얼마나 양보했을까.
  이제는 모래시계가 뒤집힌다. 봉긋했던 형의 모래가 쏟아지고 있다. 소멸할 어머니의 둔덕을 채우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의 모래를 깎아 나가고 있는 형.
  정체된 도로 위에서 우린 가만히 신호를 기다렸다. 형의 엉망이 된 차가 멈춰있는 동안 나는 바로 옆 차선에서 한 지친 트럭을 보았다. 붉은 눈빛이 지키려는 시간이 있는 듯 초조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를 맞는 트럭의 짐칸에는 고독이 실려 있었다. 우리와 다른 차선을 달리는 젖은 트럭의 고독. 나는 아버지의 모래투성이 트럭을 생각했다. 그리고 작업화를, 주물 틀을, 다섯 평 남짓한 방을, 소주방을. 그곳엔 남들의 술값을 내던 아버지가 있다. 쌀이 떨어진 우리 집보다 남의 처자식의 쌀값을 대던 철없던 가장. 가족을 겉돌았던, 외로워서 남들에게 퍼주며 살았던, 그래서 가족에게 더욱 외면 받던, 타이밍을 놓쳐 돌이킬 수 없는 관성의 내리막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트럭. 나는 내 모래를 헤집었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모래 알갱이를 찾아냈다. 터미널에서 작업화 밑굽 밑으로 쏟아지던 모래. 그리고 내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래만큼 아버지에게도 나의 모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래에 깃든 시간을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의 모래를 주고받는 시간, 아버지가 진정 순천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것.
  뒷좌석의 어머니는 소리 없이 죽은 듯 가만히 차창에 고개를 기대어 있었다. 형은 병원장으로부터 내일 당장 필요한 약품의 발주 전화를 받았다. 형이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려 차를 급히 가다 세우다를 반복하는 통에 나는 몸을 웅크려 멀미를 견뎌야 했다. 그때 문득 뒷좌석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모든 걸 내려놓은 한없이 가벼운 영혼의 소리. 낯선 평온의 소리. 형은 돌리던 연락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의 공명과 코고는 소리에 웅크린 내 멀미가 씻겨나가고 있었다.

김서현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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