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방정국의 혼란

송진우 암살사건 당시 침실에 쳤던 병풍 핏자국이 보인다. 사진/ 고하 송진우기념사업회 제공

1945년 8월 4일 광복군 제 2지대 본부
“충칭의 영감님들은 허구한 날을 네 당, 내 당 떠들고 있는가 하면 김 약산 일파는 자기 세력 확충에 혈안이 돼 옌안과 내통하고 있고, 또 일본군이 패하면 북에서 소련군이 남진할 기세이며, 옌안의 공산당 일파는 국내 진입을 위해 치밀한 공작을 벌이고 있고··· 이대로는 전후에 국내에 몰려들 여러 세력이 마구 부딪쳐, 세력 충돌이 있을 것이 너무도 명백한 일이란 말이야. 민족 분열의 비극이 내다보이는 거지” 이범석은 장준하에게 당시 정세를 이렇게 설명했다. 불행히도 예측은 열흘 후 그대로 실현된다.
임시정부 환영회에서 있었던 일
  미군정은 민족주의 성향의 임시정부를 견제해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 10만명을 국내 정진군으로 편성해 입국하려는 광복군의 계획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환영은 뜨거웠고 각 정당과 사회단체에서는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뒤늦은 입국으로 주도권 경쟁에서 선수를 뺏겼고 각 정파는 임정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목적이었다. 임정 환영회 준비 간담회에서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비난하자, 장덕수는 “임정 요인들은 그런 색안경을 쓰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나? 그렇다면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며 반발했다. 송진우 또한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쳐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세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은 삼가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라고 항의했다. 이윽고 모스크바에서 급보가 전해지며 폭풍전야는 끝난다.
애국자의 피로 물든 가짜 뉴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결정된다. 첫째, 한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할 것. 셋째,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이 최고 5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할 것.
  신탁통치에 대한 소식은 최대 이슈가 됐다. 언론은 각 정파의 논리로 왜곡해 대서특필했다. 찬반은 이념대립으로 바뀌었다. 1945년 12월 29일 경교장 회의에서 김구는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신탁통치를 식민통치의 연장선으로 보고 정권 접수를 위해 미군정과 맞설 것을 결의한다. 송진우는 “미국과 싸워 이길 수는 없으니 신중하게 대처하자”고 냉정을 촉구했으나 설득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다음날 새벽 송진우는 괴한의 저격으로 자택에서 숨진다. 비바람이 거칠게 일었다. 폭풍우가 지나자 무대에 남은 건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5. 임시정부의 해체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 납북된 임정요인들이 잠들어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제공

분단을 막기 위한 시도
  신탁통치로 인한 갈등은 미국과 소련 모두가 한반도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고자 한 것에 기인한다. 미국의 관심이 김규식으로 옮겨가자 이승만은 김규식을 찾아가서 좌우합작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김규식은 “나는 능력도 자신도 없소. 형님이나 대통령 하시오. 나는 대통이나 즐기겠소”라며 거절한다.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의 정책인데. 우리가 실행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절할 것이오”라고 재차 당부했다.
  김규식은 “이것이 독립을 위한 첫 단계이고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소”라며 “내가 나무에 올라간 다음에는 당신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을 아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된 다음에 당신 욕심대로 올라서시구려”라고 답했다. 김규식은 여운형과 파트너가 되어 좌우합작을 시작했다.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극우·극좌의 맹렬한 공격이 계속됐고 이승만은 김규식을 좌익으로 몰아 곤경에 빠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미군정의 지원약속 하에 입법의원을 창설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 문제는 조선 자신의 문제”라며 친일파 청산 특별법 인준을 보류한다. 그러던 중 여운형 암살사건으로 좌우합작은 치명상을 입는다. 이후 미국은 유엔으로 한반도 문제를 넘겼으며 한반도는 분단정권 수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임시정부의 끝
  임정 요인 대다수는 1948년 5월 10일 제헌선거에 불참한다. 그러나 1950년 2대 총선에는 임시정부 계열이 본격적으로 참여했고 전체 210석 가운데 이승만계가 24석에 그치도록 했다. 이승만에게 실망한 국민들은 독립운동가와 남북협상파, 중도파 인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2대 국회가 개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은 미처 피난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납치한다. 임시정부의 원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랍 도중 김붕준은 미군의 폭격으로 숨졌고, 유동열은 과로와 신병으로 사망했다. 김규식은 중국 국경 근처의 만포시로 끌려갔다.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고 합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으로 해서 좌도 우도 아닌 중간 노선, 중립 노선을 확고히 견지해야만 나라의 진정한 독립도 보장하고 통일도 이룰 수 있다. 우리 민족이 겪지 않았어야 할 참화와 재난과 동족상잔을 당하고 보니 원통하다. 조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6. 임시정부의 유산

독립공채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사진이다.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독립공채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
  임시정부는 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919년 11월 29일 전문 19조의 독립공채조례, 4개 항의 공채표발행규정, 전문 24조의 공채모집위원규정을 각각 제정·공포해 1920년 4월 17일부터 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예산을 독립공채로 충당했다.
  공채의 원금은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 5년에서 30년 이내에 수시로 상환하기로 했으나 1983년에야 독립공채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시행했다. 특별조치법상 신고 기간은 2000년 12월 31일으로 끝났고 독립공채상환위원회는 2009년에 활동을 종료했다. 다만 통일 후 북한 주민의 상환 요청 가능성을 고려해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남겨둔 상황이다.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정신 새기다
  헌법의 전문은 헌법 제정의 유래와 헌법 제정권자, 제정목적, 헌법의 기본원리 등을 선언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건국정신과 통치권 원천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명시하는 것이다. 한국 헌법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헌장으로부터 해방 후 제헌국회가 제정한 제헌헌법 이래 현행헌법에 이르기까지 전문을 채택해왔고 그 전문에는 한국의 건국이념으로 3·1독립정신의 계승을 명시해왔다.
  해방 후 1948년 7월의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서도 임시헌장의 선례에 따라 3·1독립정신의 계승을 그 건국이념으로 선언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족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이처럼 1948년 제헌국회의 헌법전문은 대한민국 임정의 건국을 제1 공화국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의 근원인 동시에 정당한 통치권의 원천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1962년 12월 26일 군사정부는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부분을 삭제했고, 1972년의 유신헌법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위를 부정했다. 그리고 1980년 10월 27일 헌법개정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살리지 못했다. 드디어 1987년 6월 항쟁 이후 9차 개정 헌법 전문에 드디어 임시정부의 법통을 다시금 명시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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