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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①
이강우 기자 | 승인 2019.04.16 17:33|(1150호)

해방 후 60년이 흘렀지만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차갑다. 얼마 남지 않은 기록과 증언은 임시정부를 신화로 만들었고, 신화와 전설이 없는 시대에 임시정부는 그저 그런 사랑방 이야기가 되었다. 1987년에 현행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명문화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폄훼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임시정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래의 3개 사건·사고를 통해 해방 전 임시정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상해교민단 환영회 1920년 12월 환영회에 참석한 이승만. 사진/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1. 위임통치 청원 사건
임시정부의 시작과 혼란
  1919년 3·1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확인한 지사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임시정부를 수립을 준비했다. 4월 11일 아침 상해에서 최초로 대한민국이 건국되니 바로 임시정부의 시작이다. 안창호, 홍진의 주도로 각지의 임시정부 통합이 실현되는 듯 했으나 대통령으로 지명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전력을 두고 분란은 끊이지 않았다.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란
  1919년 1월 이승만과 정한경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공동명의로 한국 위임통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항, 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구출할 것. 제2항, 열강은 장래 한국의 완전 독립을 보장할 것. 제3항, 한국은 당분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둘 것. 문제가 된 것은 3항인데, 신채호와 김창숙은 이 때문에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했으며 임시정부 참가도 거부했다. 특히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며 강력히 성토했다.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동휘 또한 이승만을 ‘썩은 대가리’라고 공격하며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대립했다.
임시정부의 분열과 갈등
  임시정부의 분열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념과 방법론, 지역과 신분의 차이에 따른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면서 정부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구는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해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이 벌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향방을 두고 소집한 국민대표회의에서도 지사들은 개조파와 창조파, 유지파로 갈려 서로간의 입장차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어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내무총장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써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고 결국 지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민주주의를 익히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었다.

남목청 사건 치료 받고 건강을 회복한 김구. 총상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 부산시립박물관 제공

2. 임시정부의 피난과 남목청 사건
임시정부의 피난
  이봉창,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수색과 추격은 더욱 강해졌다. 정정화는 “당시 상해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었으므로 프랑스 당국은 일본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프랑스 당국은 우리에게 즉시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했다”며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이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의 보복을 피해 각자 안전한 연고지를 찾아 흩어지거나, 활동을 멈추고 지하로 은신했다. 1932년 5월 상해에서 탈출한 임시정부는 1940년 중경에 도착하기까지 8년간 중국 각지를 옮겨 다녔으며 그 거리는 6천 킬로미터가 넘는다.
남목청 사건
  남목청은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남목청 사건은 임시정부와 조선혁명당이 독립운동 진영 통합을 위해 만난 자리에 갑작스레 난입한 괴한의 총격으로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이 피습당한 사건이다. 현익철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괴한의 정체는 한국인 이운환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도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 당국은 이운환은 물론 배후로 추정되는 인물인 강창제, 박창세도 검거했으나, 뚜렷한 혐의점이 나오지 않아 대부분 석방했고 이운환은 중일전쟁으로 장사 시내가 혼란에 빠지자 유유히 탈옥하여 도주했다.
  안병무는 “이운환은 스파이라기보다는 불평분자인 듯하다. 평소 이운환은 임시정부 어른들이 자기편 견해를 고수하여 일에 별 진전이 없었고 조선청년단 청년들에게 주는 생활비가 적어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라고 평하며 내부 불평분자가 김구와 독립운동가들을 살해하고자 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그가 일제의 스파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탈옥 후 행방이 묘연해져 진실을 알 수 없게 됐다.
사건 이후
  김구는 총탄을 맞고 쓰러진 후 1개월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 회복했으나 이후 수전증이 심해져 그의 휘호는 ‘떨림체’라는 별칭을 얻었고, 스스로 ‘총알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이후 중일전쟁의 여파가 내륙 깊이 미치게 돼 독립운동 진영 통합 논의는 연기됐으며 후일을 기약하게 됐다.

학병 출신 광복군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사진/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3. 학병들이 기록한 임시정부
장준하의 폭탄 발언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서 받은 서러움을 다 잊으셨단 말씀입니까? 그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학병 출신으로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찾아온 장준하의 말이다.  
충칭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937년 7월 일제는 중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다. 예상과 달리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저항은 완강했고, 1941년 12월에 시작한 태평양전쟁에서도 일제는 미국에게 밀리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제2차 대전의 발발로 프랑스, 폴란드, 네덜란드 등의 반파시즘 망명정부가 수립됐고 연합국의 원조하에 파시스트 정부에 저항했다. 임시정부는 이 같은 국제정세를 활용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선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 통합으로 역량을 집결해야 했다. 김구는 좌파 계열을 꾸준히 설득하여 연합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으나,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 투쟁이 전개됐다.
김준엽과 이범석
  학병 출신이며 장준하의 동료였던 김준엽은 “우리가 할 일은 일제를 타도하는데 한목숨을 값어치 있게 바치는 일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다"며 또한 "파쟁이라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고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길을 잃은 청년들에게 나타난 건 이범석이었다. 그는 광복군의 한국 침투 작전을 위한 훈련을 계획 중이라며 "여러분을 나의 동지로 맞고 싶소. 나와 함께 시안으로 가주길 바라지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라야만 한다는 것이오"라고 권유했다. 광복군의 한국 침투 작전에  대해 김구는 "그건 사실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곳에서 진정한 위국의 길이 열릴 것이다"라며 청년들을 격려했다. 독립운동의 마지막 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강우 기자  rainfall92@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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