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별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재희는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 없이 막 웃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웃어버리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참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좋은 인연들을 사소한 오해와 갈등, 자신 혹은 서로의 비겁한 이기심으로 잃었다는 것이 떠올라 슬퍼졌다. 스물다섯 살의 재희는 스물 한 살의 재희를 떠올렸다.
  “나를 사랑해? 난 너를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정말로. 진심이야.”
  스물 한 살의 재희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옆에 있었지만 재희는 그가 곧 부셔져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자주 경솔하게 사랑의 말을 확인했다. 말은 공기를 진동시키다가 곧 사라졌다. 마치 향수와도 같이. 향수는 본래 몸을 씻지 않은 이가 더러운 냄새를 감추기 위해 사용했던 것. 두 사람의 말에도 사실 거짓이 있었다. 모든 언어가 사라진 침묵 속에서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을 감춰야만 했다. 진실이 드러날 것 같으면 재희는 향수를 뿌리듯이 경솔하게 사랑을 말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언어를 싣고 오는 그의 말의 억양과 높이를 안달복달 살폈다.
  어느 날은 그와 함께 106번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 둔산동으로 향했다. 둘은 앞뒤로 앉아 도착을 기다렸다. 버스 안은 조용했고 재희는 무엇인지 모를 불안함 때문에 자꾸만 그의 뒤통수를 살폈다. 이렇게 가까워도 마치 제논의 거북이처럼 영원히 닿을 수만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뒤에서 재희는 많은 생각을 했다. 우물같이 깊고 아득한 눈을 떠올리면 꼭 안고만 싶었고 그의 비겁한 의심 몇 개, 거짓말 몇 개를 떠올리면 서로의 거리가 무한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남자친구의 가지런한 글씨나 정성이 담긴 요리를 떠올리고 기쁨을 느꼈다가도 그녀가 열정을 느끼는 것을 이미 식어버린 눈으로 차갑게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를 생각하면 너무나 화가 났다. 문득 슬퍼진 재희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마주보고 오는 106번 버스의 기사가 그들이 탄 버스의 기사에게 꾸벅 인사하며 손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 순간 재희의 마음은 갑자기 행복감으로 차올랐다. 그저 버스 회사의 가이드라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치는 사이의 인사라는 행위에 담긴 다정함과 각자의 자리에서 보내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다. 나는 남자친구를 다정한 너그러움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믿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재희는 이별을 직감했다. 서로에게 한없이 수렴하려고 갖은 애를 썼던 두 사람은 결국 한없이 멀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재희는 사랑했던 그 사람의 삶이 앞으로 더 행복하기를 조용히 소망했다.
  그로부터 일년 뒤에 한 번 그 사람과 마주칠 일이 있었다. 기숙사에서 사는 친구를 만나 같이 까페에 갈 생각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버렸고 바깥은 해가 쨍쨍해서 눈을 뜨기조차도 힘들었다. 1학년 때 종종 가서 목요극장을 관람하던 충남대 역사전시실이 문득 떠오른 재희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 가서 친구를 기다리기로 했다. 역사라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관람한 박물관을 또 방문할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시선이 얼마나 변화했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보인다는 재미가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재희는 그와 마주쳤다. 자신이 먼저 멀어진 상대인데도 갑작스런 해후에 막상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눈물을 흘리고 싶을 정도의 반가움이었다. 그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데 눈에 들어온 것은 70년대 후반의 충남대학교의 전경이었다. 이 넓은 우주와 영원한 시간 속에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이기적이고, 그보다는 어설퍼서, 서로를 그저 침묵 속에서 자유롭게 바라볼 수 없었다. 70년대의 충남대에도 수백의 사람이 서로 만나 생긴 수천의 문제가 있었겠지. 그렇지만 그런 건 대부분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은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50년대를 살아가던 그들이 사랑을 보았던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2010년대의 충남대 목요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으니. 그 날 재희는 강렬하게 다시 사랑의 예감을 느껴버렸다. 

오유리(일어일문·3) ur39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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