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큐레이터가 ‘토크’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주로 미술관 등에서 이뤄지는 ‘토크’는 전시와 함께 기획되고 작품의 기획 의도 또는 작업 방식들을 소수의 대중에게 전달한다. ‘토크’에 대한 저자의 문장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몇 있다. “토크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인 매체로 작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토크’는 전시만으로 표현되지 않는 작품요소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토크’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이 문장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살을 붙인다. “(그 후) 토크의 내용이 떠오르기보단 주변 요소가 먼저 생각난다.” ‘토크’의 주변요소 역시 ‘토크’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본래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토크’는 완전히 실패한 정보 전달 방법이 된다.
‘토크’를 비롯한 말하기의 형태를 가진 여러 정보 전달 방법은 시간 의존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말하기가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 그 시간에 청자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정보 전달은 실패한다. 시간 의존성을 가진 정보 전달은 ‘토크’ 말고도 여럿이 있지만 혼동의 여지가 없으면 그 모두를 토크라고 부르자.
우리 사회에서 대학만큼 토크가 자주 발생하는 장소는 드물 것 같다. 수백 개의 각기 다른 형태의 강의가 동시다발하고 이들 모두는 토크가 된다. 대학은 고등교육을 위해 특별히 만든 공간이다. 교육에는 여러 방법이 있고 대학에서도 강의 외의 방법으로 교육이 이뤄지지만, 대학 교육에서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육이므로 교육과 강의를 같다고 근사하자. 그렇다면 대학은 토크를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겠다.
토크의 시간의존성 때문에 토크는 항상 일정한 공간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공기가 소리를 매개하고 매질인 공기의 부피 때문에 공간이 요구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도, 단순히 쾌적함의 문제로도 공간이 토크의 필수 요소임은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실행에 있어 항상 특정한 제한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토크는 방법론 측면에서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토크를 이렇게 사랑하고 즐겨하는 이유는 사람의 본성이 비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토크라는 방법이 이 모든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채용할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토크의 매력은 역설적이게도 시간-공간 의존에서 온다. 대부분의 기획자는 이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자 치열한 준비와 계산을 한다. 그러나 비록 준비되지 않은 토크라 할지라도 토크는 때론 서로의 관계가 뒤바뀌기도 하는, 화자와 청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토크는 충분히 생기를 띈다. 우리가 토크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자, 그럼 우리 이제 떠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