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아니면 영화라도 많이 보자

천세영 교수 (교육학과)

  대학 교문을 처음 들어선 해가 1975년이고 그 후로 한 번도 대학을 떠나 본 적이 없으니 대학 캠퍼스를 거닌지가 어언 43년 반세기요 인생의 대부분을 대학인으로 살아 온 셈이며, 이미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학을 준비했다고 보면 결국 나는 평생 대학인이었던 셈이다.
  43년 전 참으로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생이 되었던 날들은 정말 잊을 수가 없는 기억들이다. 대학생으로서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을 것이로되 그 중에는 즐겁고 재미있게 한 일도 있었으며 그렇지 못해 아쉬운 일 또한 있다. 그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마도 입학하자마자 학우들과 함께했던 독서회였다. 당연 독서회는 나만 그랬다기보다는 당시로서는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러했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제 겨우 배고픔을 면하고 조금씩 경제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고향친구들은 공장에서 회사에서 일찍부터 이른바 생활전선에 나서야했지만 나와 같은 대학생 친구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복을 누린 셈이었다. 그런 대학생들을 구별하는 가장 대표적인 모습의 하나가 아마 독서회였을지도 모른다.
  1970년대 세계는 온통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풍미했고 이제 갓 눈을 뜬 대한민국 사회에도 물밀 듯 들어오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대학은 하루 쉴 날 없이 최루가스를 마셔야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빨간 금서가 되어 대학가를 파고 들기도 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대학신입생 시절 괜히 우쭐하며 뽑아들었던 책들은 대체로 실존주의 류의 소설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프카의 변신, 샤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이방인, 버지니아울프의 델라웨이 부인 등등, 사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뭘 안다고 그랬을까 싶다. 독서회에 이쁘고 왠지 마음 설레게 하는 여학생이라도 있을라치면 괜히 더 아는 체를 했다.
  대학생들은 왜 책을 읽어야 했을까? 그리고 책 중에서 어려운 책들을 골라서 읽어야 했을까? 사실은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대학이란 곳 자체가 원래 그 출발부터 어려운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마 40여년전 대학생이 되었던 시절 우리는 그런 대학인의 기본 흉내를 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밤이면 막걸리에 취해 책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른바 개똥철학을 읊어대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 그 시절이 그립다. 분명 나이 든 노인의 향수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시절의 낭만이 그립다. 그리고 오늘의 대학생들도 그러기를 바래본다. 그렇지만 교정에서 도서관에서 강의실에서 만나는 오늘의 대학생들은 그래 보이지를 않는다. 어떤 이가 그런다. 중앙도서관 열람실에 빼곡이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고 전에는 아, 어느 학과 학생이겠구나, 아,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학생이겠구나 했는데 요즘은 도대체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펼쳐 놓은 책들은 한결같이 토익과 상식 법전 등 취준 교재들 뿐이기 때문이란다. 허, 허, 그거 참 ! 슬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옛 대학시절이 철없는 허풍이었을지라도 난 여전히 올해의 노벨상 소설책을 읽는 일이 취준 교재를 읽는 일보다는 아름다운 일임을 부정할 수가 없지 않는가.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한 가지 꾀를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어려운 소설책이 아니어도 좋으니 차라리 매주 한편씩 영화라도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사실 이제 글자로 된 두꺼운 소설책의 시대는 가고 있다. 디지털시대라 함은 글자의 시대가 아닌 영상의 시대이다. 이제 반세기전의 개똥철학 소재가 책이었다면 오늘날 그것은 영상인 것이다. 또한 인터넷과 스마트티비를 보면 20세기 이후 제작된 주옥같은 영화들을 쉽게 다운받아 볼 수도 있다. 독서감상록을 쓸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한 컷을 짜르고 내 목소리를 입혀 유트브 한 컷을 찍어 올리는 시대가 되었다. 유투브개똥철학이면 어떤가, 그것이 청춘의 아름다움이요 인생의 고매함 아니겠는가. 누가 아는가 그것이 취업인터뷰때 한 방 크게 쏠지 말이다. 오늘의 대학생들이 낭만을 더 이상 잃지 않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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