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있게 경청하는법’’

김수한 수습기자 (해양안보학과)

  학교, 회사, 동호회, 군대 등 수없이 많은 집단에서 우리는 사회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로 이어지는 무리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화를 나눌 때에는 화자와 청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할 말과 하지 못할 말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암묵적 이치를 지켜나가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우리 사회 대다수는 오고가는 대화에서도 당신의 입이 아니라 귀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듣는 법을 통해 상대의 언어에서 온도차를 느낀다. 아마 우리가 흔히 쓰는 ‘카카오톡’으로 나누는 대화와 전화상으로 나누는 대화, 눈앞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하는 대화, 그네를 타며 맥주 한 캔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에서도 같은 말이라도 다른 해석을 유추할 수 있다. 차갑게 말하느냐,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하느냐 등 표현의 방법도 무궁무진하다. 그렇기에 경청은 그 자체로 어려워진다. 경청은 말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서 말한 상황적 의미에 따라 말 사이에 배어 있는 감정은 물론 상대의 목구멍까지 차오른 절박한 말까지 헤아리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회적인 지위, 합리적인 해석에 따른 가치의 편중화 등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 다소 힘겨운 상황에 놓여있다. 경청은 안중에도 없고 각자 살기 바빠서 그런가. 대화에 있어서 말하기와 듣기의 기울기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사람은 불안해 한다. 말을 많이 해야만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말을 적게 하면 관심의 대상으로부터 멸시된다는 박탈감 때문일까. 공공연하게 스쳐 지나가는 마음의 소리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 과에서 존경 받고 있는 글귀이자 개인적으로 동경하는 언사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를 존중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우리는 갈망하고 있다. 듣는 일 그 시작으로써 경청은 가장 품격있고 고차원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의사소통의 시발점이 듣기라면, 말하는 화자의 입장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대화의 기울기가 수평으로 유지될 때 비로소 공감능력과 대화의 불씨가 힘을 얻는다.
  ‘소신 있게 말하기’와 ‘무례하게 말하기’는 다르다. ‘가치관이 뚜렷하다’와 ‘고집이 세다’라는 말 또한 다르다. 기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가치관이 합당하다고 해서, 타인의 가치를 매몰시킬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니야. 내 생각은 이런 거야’ 보다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거 같아’ 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가?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앞서 말한 단순한 두 마디에도 온도 차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확립하고 현명하게 대화하는 사람에게는 단지 설득하는 방법을 찾기 보다는 공감 능력을 활용해 감정을 짚는 방법으로도 대화를 장악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람들은 화술의 달인일런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래서 말 잘하는 법이 뭔데?’라고. 딱히 없다. 다시 말하면 정해진 답이 없다. 전 세계 인구 62억 명이 웅변의 달인 버락 오바마, 토크 계의 전설이라고 불리 우는 래리킹이라면 무슨 재미가 있나? 결국 그 사람들도 청자가 없으면 말 못하는 벙어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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