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말라 버린 역사적 상상력의 복원이 필요한 때다

  지금 우리 시대를 ‘혐오’의 시대라고 정의해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최근 가장 심각하게 대두하는 ‘여성 혐오’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성소수자 혐오,’ ‘노인 혐오,’ ‘이주민 혐오,’ ‘외국인 혐오,’ ‘유가족 혐오’ 등 수많은 혐오 문제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병폐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극단적 감정 표출로서 ‘혐오’가 단지 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존재라면 누구에게든 여과없이 표출되는 일상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감정표현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미움이란 감정은 단 하나의 감정이 아닌 일종의 감정적 스펙트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낯선 것에 대해 불편할 수 있고 상처주는 것에 대해 당연히 자기 보호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일시적이거나 자기방어적인 성격이 짙기 때문에 언제든 해소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감정이 나아가 편견이 되고 ‘혐오’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전환되어 표출될 경우이다. 이런 극단적인 감정으로서 혐오가 심각한 이유는 언제든지 차별과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이며, 더욱 문제인 이유는 이러한 폭력이 도덕적·종교적으로 정당화되거나 초법적으로 행사되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가 인간성의 타락과, 심지어는 몰락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은 수없이 많다. 1990년대 중반 보스니아 내전 과정에서 일어났던 크로아티아계의 무슬림 인종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려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 정권의 유태인 혐오도 그러한 예이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무고한 흑인들에게 자행되었던 초법적 테러 행위로서 린칭(lynching)도 혐오문화의 대표적인 폭력적 분출 형태였다. 사실 이러한 혐오 표현이나 증오 범죄의 위험성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일찍부터 인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역사를 보면 메릴랜드 식민지가 이미 1649년에 종교관용법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에 규정된 핵심적 내용 중의 하나가 종교적 자유의 허용과 함께 종교적 혐오 표현에 대한 법적 규제였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이러한 혐오 표현과 증오 범죄의 표출 이면에는 특권적 질서나 지배적 체제 혹은 우월적 지위를 지켜내고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기득권층의 일종의 강박적 두려움과 광기가 존재했다.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혹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두려움과 광기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허위적 우월성에 대한 두려움이자, 내 존재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광기에 불과했다. 히틀러의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가 그러했고 미국 백인들의 백인우월주의가 그러했으며 남성우월주의와 배타적 종교이념 또한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로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존한다.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게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편견과 차별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비로소 공감과 공존의 진정한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은 사변적인 인식이 아니다. 역사는 공감과 공존을 부정했던 인간사가 남긴 추악한 자취와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이에 만연한 혐오의 문화에 대한 무관심이나 이것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쉽게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은 혐오가 어느 사이엔가 전염병이 되어 인간 사회를 휩쓸 수 있었던 역사적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혐오라는 오염된 문화에 노출되어있는 우리는 혐오를 두려워해야 하고 경계해야 한다. 나 자신도 어느 순간 정당한 이유 없이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상호 이해와 존중, 그리고 공존의 사회를 꿈꾸고 키울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을 복원해야 한다.

저작권자 © 충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