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혜심 '소비의 역사'

  현대인들은 매일 무언가를 소비하며 산다. 무엇을 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소비가 생산보다도 더 밀접한 일과가 된 지 오래이다. 의식주에 관한 필수품부터 일상의 편의를 위한 서비스 상품 등. 우리는 사고 또 사며 산다. 내가 소비하는 것이 나를 규정한다(I am what I consume)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이다. 인공지능(AI)을 탑재한 기계가 생산과 노동을 점령해가는 상황에서 소비는 머지않아 인간에게 남은 가장 중요하고도 고유한 활동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소비하는 인간, 즉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은 ‘소비’의 면모를 근대 이후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으로 탐구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비의 역사인 ‘소비사’는 지금껏 한국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주제가 아니며 서양에서도 최근에 출범한 분야로, 1980년대 후반의 일부 학자들이 산업혁명 이전에 소비혁명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역사학자인 설혜심은 소비사와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사치나 방탕으로 연결 짓던 소비를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끌어올린다. 나아가 소비 행위를 통해 역사학이 주목하지 않았던 인간의 행위와 동기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내밀하게 분석하고자 시도한다.
  저자인 설혜심 교수가 소비가 바꿔놓은 사회상으로 제시하는 사례 중 하나는 ‘에이본 레이디(Avon Ladies)’이다. 이 이름이 낯선 한국인들은 ‘아모레 아가씨’를 떠올리면 조금 쉽게 연상될 것이다. 지난 2015년에 방송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아모레 아가씨가 등장하는데, 40대 주부인 정환의 엄마는 2시간만 나가 있으라며 남편을 억지로 내보내고는 친한 이웃들과 집에서 ‘아모레 아가씨’와 ‘쥬단학 아줌마’를 기다린다. 유니폼을 입고 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화장품 가방을 맨 그들이 차례로 벨을 누른다. 이들은 서비스로 피부 마사지를 해주고 샘플을 나눠주며 수다를 떨다가 결국은 대량으로 화장품을 판매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1980년대 한국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던 화장품 방문판매원의 원조는 미국의 ‘에이본 레이디’이다. 원시적인 물물교환 이후 가장 오래된 판매 방식이라는 방문판매는 19세기 초반 미국 대륙 곳곳을 돌며 필기구, 책, 주방용품 등 다채로운 품목을 팔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인 판매원 데이비드 홀 매코널(David H. McConnell)이 세운 회사인 에이본은 향수나 화장품을 주로 팔았는데, 당시의 관례를 깨고 최초로 여성 판매원을 고용하게 된다.
  ‘에이본’은 미국의 방문판매 화장품 회사로, 회사에 소속되어 에이본 제품을 직접 판매하는 여성 방문판매사원들을 ‘에이본 레이디(Avon Ladies)’로 일컬었다. 현재까지도 100개 이상의 나라에서 550만 명의 에이본 레이디들이 활동하고 있다. 에이본이 설립된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기본적인 비즈니스 플랫폼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에이본 레이디는 에이본으로부터 할인된 가격에 제품을 구매한 후 에이본 카탈로그에 명시된 가격을 받고 고객에게 제품을 판매한다. 그러나 안락한 응접실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화장품을 늘어놓고 담소를 나누는 일은 주부들에게 판매 이상의 여흥이자 짜릿한 경험을 선사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도 경제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방문 판매원은 남성이라는 공식을 깨는 혁신적인 발상이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화장품은 여전히 지극히 여성적인 상품이고, 그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조차 여성판매자와 여성 소비자로 한정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남성과 분리된 여성만의 교환체계를 구축한 것이며, 구매력을 갖춘 여성들이 소비의 주체보다는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특히 생산과 진보를 중시하는 근대사회가 노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임의로 규정하고 그들을 중심적 위치에서 소외시켰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과는 단순히 물건을 사거나 쓰는 행위만이 소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이나 전쟁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소비도 세상을 바꿔왔다. 소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 책을 접한다면 소비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과 즐겁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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