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다음날

김동영 기자(경제학과 2)

  꿈은 불온전한 현실을 위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자주 상상에 빠질 때였다. 길을 걷거나 음식을 먹으면서도, 또 책을 읽다가도 당시의 나와 다른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그래서, 자주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고민했다. 꿈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현실의 영역을 조금씩 잠식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현실의 영역을 지우고 좋은 꿈속에서 완전한 존재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처음 겪는 현실의 중압감 때문인지 생활에 상상이 개입할 틈이 없다. 주말이면 병문안을 가서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병원 근처의 24시간 카페에 들어가 기사를 준비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세 시간 동안에도, 카페 창밖을 멍하니 쳐다볼 때도 쉽게 무언가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꿈의 영역이 이제 사라져 버린 걸까, 생각한다. 꿈과 상상이 없는 시간. 그러니까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내 모습을 인지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다 기자수첩 원고를 쓰게 됐는데 얼마나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으면,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감상문이라도 쓰자, 하는 마음에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즈음 구매해 읽었던 은희경 작가의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였다. 이 책을 산 건 은희경 작가의 전작 「태연한 인생」을 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도 했고, 또 당시 최신작이어서 책 구매자에게 눈송이향 향수를 이벤트로 줬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유로 샀지만 완독한 뒤엔 이 책이 소설을 좋아하게 만든 계기가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제목을 좋아한다. 연작소설집인 이 책의 제목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남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신만의 고유성과 개성을 갖고 있는 존재. 반대로 생각해보면, 남들과 구분되지만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존재. 전자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게 하고, 후자는 타인과의 연대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두 번째로 수록된 소설 <프랑스어 초급과정>과 연결해 생각하고 싶다. 개인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낯선 경험을 축적하며 살지만, 매 순간 낯선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소설 속 여자는 바이올렛을 사서 키운다. 바이올렛이 성장하며 잎을 내면, 그 잎을 잘라 물이 담긴 유리병에 옮겨 심는다. 그러면 그 유리병에 뿌리가 돋아나는데 그 뿌리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거기에서도 어김없이 꽃이 핀다고 한다. 그런 방법으로 여자는 화분을 열네 개까지 늘린다.
  “잎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도마뱀 꼬리가 끊어지는 자리에서 다시 꼬리가 나온다는 건 알겠지만 잎에서 뿌리가 돋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엄마의 특별할 것 없는 재주를 칭찬했다. 시간이 걸릴 뿐이야. 엄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결국 혼자 해야만 한다는 걸 가르쳐줘야 해. 뺨이 상기된 채 유난히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엄마는 모처럼 웃음을 지었다.”
  여자의 말에 뱃속에 있던 아이는 운다. 결국 혼자서 낯선 세계를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런 삶이 공통된 것이란 점에서 잠깐 웃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읽은 소설이 지금의 나에게 더 와 닿았다. 비가 온 다음 날이어서 감정이 풍부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비 오던 밤, 병원 복도의 창문은 닫혀있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활기 없는 사람들이 지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봤을 테다. 새로운 곳에 내던져진 사람들에게 비가 유리병의 물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유리병에서 꽃이 폈듯 다시 생기를 되찾았으면 좋을 것 같다. 그 분들이, 늘 잘못된 방향을 짚어왔던 내가, 그리고 그런 나에게 공감해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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