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하는 삶, 선행을 가로막는 삶

  지난 21일 오후 제천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화재 속에도 수많은 인명을 구조한 선행들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머뭇거리던 여자 손님들을 과감하게 대피시킨 중학생과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중학생을 대피시킨 헬스클럽 관장, 다시 불길 속에서 4층과 5층으로 올라가며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갇혀버린 그 관장을 포함한 3명을 개인 사다리차를 동원해 구조한 민간 크레인업체 부자 이야기 등 인명 구조의 손길은 서로에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수많은 악행들이 취재와 수사를 통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의 황금만능주의와 원칙의 실종에 실망하다가도, 평범한 이웃들이 보여주는 이런 영웅적인 선행들을 접하면서 다시금 더 큰 희망을 갖게 된다.
  이런 선행들을 접할 때면 우리는 잠시 상념에 잠겨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언제 선행을 했던가?”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이 질문에 답을 구하려면 먼저 자신이 그동안 해 온 어떤 행위들이 선행에 값하는 일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의 인명을 구할 만한 큰일과 맞닥뜨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 선행은 우선 그 기회를 만나는 것부터가 축복일 수 있다. 인도사람들은 선행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인도인들은 남이 베푼 선행을 받아도 그에게 감사해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의 선행을 받아줌으로써 그 사람이 선업을 쌓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도 출장을 자주 다닌 동료 교수도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다고 하며 이런 통념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인도인들의 가치관이 독특하기는 해도 또한 배울 점이 있다. 선행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살면서 그럴 기회가 생기면 주저 말고 실행하자는 마음을 먹게 한다.
  자신이 큰 위험에 처하면서 남의 생명을 구한 의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모두 같은 대답을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큰 선행을 행한 사람도 특별한 사람이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선행이 결코 특별한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평범한 사람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 그렇게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 모르겠다, 따라서 선행은 그것이 영웅적이든 모습으로 나타나든, 아무의 눈에 띠지 않고 그저 일기장 속에 적혀질 따름이든 모두 다 평범한 사람들이 행한 일이다.
  영웅적인 일만이 선행은 아니다. 스토리가 있어야만 선행인 것도 아니다. 나의 사소한 이익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남의 어려움에 먼저 몸과 마음을 쓰는 일이면 그것이 바로 선행이다. 커다란 위험 속에서 피어나는 영웅적인 선행과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상황 속의 선행은 따라서 구조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올해 이웃돕기 온도계 탑의 눈금이 좀체 올라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웃돕기 성금을 모아줬더니 온몸에 고가의 문신을 하고 오히려 남을 괴롭힌 짓이 들통 난 자, 국정을 농단하여 나랏돈을 빼돌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자, 공권력을 이용해 민간인들의 돈을 가로채고 공기업을 망가뜨린 의혹을 받아 언론과 검찰의 추적을 받고 있는 한 때의 정치지도자, 이런 자들이야말로 우리 평범한 시민의 선행을 가로막는 적들이고, 이웃돕기 온도계를 싸늘하게 만든 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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